소음을 대하는 태도 :: 2017/03/08 00:08
스타벅스에서 블로깅을 할 때
예전엔 주변에서 소음이 들려오면 좀 민감해지는 편이었다. 옆 테이블에서 대화가 좀 시끄럽게 전개되는 느낌이 들면 귀가 자꾸 그 쪽으로 당겨지면서 예민해지는 흐름을 막기가 어려웠다. 그래서 이어폰을 꺼내서 음악을 듣곤 하게 되는데 그렇게 해서 음악을 별도로 듣는다는 게 그리 즐거운 경험은 아닌 것이고. 그래서 스타벅스에서 소음을 만나면 나름 당황하게 되는 흐름이 계속 이어져 왔던 것 같다. 그런데 스타벅스에서의 공간감이란 경험을 하게 되면서 소음을 대하는 나의 태도에도 조그만 균열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아주 기분 좋은 균열. 스타벅스에서 공간감을 느끼며 결핍감 없이 온전히 스타벅스에서의 시간에 집중하게 되자 예전과는 달리 소음에 대한 나의 태도가 굉장히 편안해지고 부드러워진다. 소음이 들려도 그것에 귀가 감각을 곤두세우지 않는다. 그냥 소음이려니 하게 된다. 스타벅스에 흐르는 음악과 유형이 좀 다를 뿐 앰비언트 사운드라는 차원에서 수용 가능한 정도의 소리라 인정하게 된다. 그냥 스타벅스에서 흘러나올 수 있는 소리라고 인정하게 되자 소음 민감도는 현저하게 줄어들게 된다. 결핍감이 덜한 공간에서 소음을 전보다 편안하게 대할 수 있게 되니 스타벅스는 더욱 더 나에게 있어 흐뭇한 공간이 되어가는 것 같다. 그리고 이런 공간감을 다른 공간에 어떻게 하면 전이시킬 수 있을까란 생각도 하게 된다. 결국 핵심은 나의 뇌가 무엇을 경험하고 느끼는 것이라면 이런 공간감은 충분히 스타벅스 밖으로 확산시킬 수 있을 것 같다. 일단 스타벅스에서 이런 느낌을 계속 만끽해 나가다가 나중에 확장성의 기회를 차근차근 엿보아야겠다. ㅋㅋ Trackback Address :: http://read-lead.com/blog/trackback/2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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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존 에코 :: 2016/05/25 00:05
아마존에코를 사용해 보니 이게 은근 매력이 있다.
"알렉사"라고 부르면 아마존 에코가 다음 명령어를 기다린다. "음악을 연주해줘"라고 말하면 음악을 랜덤하게 들려준다. 재즈를 부탁하면 재즈를 들려주고 특정 아티스트를 언급하면 그 아티스트의 음악을 들려준다. 직접 뮤직 서비스에 접속해서 번거롭게 원하는 음악으로 좁혀들어가지 않고 한 번에 원하는 걸 말하면 그걸 플레이 시켜주는 흐름. 접근성 측면에서 현저히 변화된 경험이다. 아마존 에코를 경험하게 된 후로 음악 서비스 접속이 어려워짐을 느낀다. 알렉사만 부르면 음악에 바로 접근할 수 있다 보니 컴퓨터를 켜고, 폰 속의 뮤직 앱을 열고.. 원하는 음악을 입력하고 하는 일들이 매우 번거롭게 느껴진다. 그런 흐름들이 이전엔 괜찮았던 경험이었는데.. 아마존 에코가 그것이 괜찮지 않다고 나에게 체감을 시켜주다 보니 나도 어쩔 수가 없는 것 같다. 특히 아마존에코가 좋을 때는.. 누워서 음악을 감상할 때다. 누운 상태인데도 불구하고 눈을 감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음악 서비스를 이용할 수 있다는 게 놀랍다. 눈을 뜨지 않고 손을 사용하지 않고 말 한마디로 뮤직 플레이를 가능하게 하는 경험. 예전에 사용하던 감각기관을 멍때리게 하고 예전에 사용하지 않던 방식으로 서비스를 작동시키다 보니 음악 자체가 새로워진 느낌마저 든다. 음악과 만나는, 음악과 대화하는 방식이 바뀌었다. 아마존 에코를 알기 전과 아마존 에코를 알게 된 후의 나는 살짝 다른 것 같다. 그 달라진 지점에 대해 계속 생각해 보면서 나는 음악과 새로운 방식으로 교감하게 될 것 같다. :) Trackback Address :: http://read-lead.com/blog/trackback/19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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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레이리스트 :: 2016/05/18 00:08
맘에 드는 음악이 어디선가 들려올 때 Shazam을 즐겨 사용한다.
Shazam으로 음악을 인식해서 그 음악이 뭔지 알아내는 즐거움이 제법 쏠쏠하다. 그런데, 그 기능을 자주 이용하다 보니 욕심이 진화하게 된다. 이젠 단순한 음악 인식에 그치지 않고, 그냥 들려오는 음악을 자동으로 인식해서 플레이 리스트에 담아주면 좋겠다는 요구사항이 생긴다. 커피전문점에 앉아 있으면 어떨 때는 들려오는 음악들이 무더기로 좋은 경우가 있는데 그 경우엔 매번 Shazam을 터치하는 것도 고역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1. 커피전문점에서 연신 저격해대는 나의 취향과 2. Shazam의 터치 기능과 3. Shazam에서 인식한 음악을 페이스북에 저장해 두는 경험이 서로 만나고 연결되면서 오토 플레이 리스트에 대한 필요가 생겨났다. 한 곡을 겨냥 터치해서 인식하는 게 아니라 특정 장소를 겨냥한 Shazam 터치를 통해 특정 공간에서의 일정한 길이의 시간 전체를 인식하는 기능이 필요하다. 뮤직 플레이 리스트는 철저히 개인화된 내용이자 구조. 그걸 얼마나 편하게 생성하게 해주고 그것이 다음 번 플레이로 자연스럽게 이어질 수 있는 흐름이 나온다면 음악은 또 다른 국면으로 진화할 기회를 잡게 될 것 같다. 시간과 공간을 채색할 수 있는 색채로서의 음악. :) Trackback Address :: http://read-lead.com/blog/trackback/19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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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hazam :: 2016/05/16 00:06
스타벅스에서 아메리카노를 마신다.
들려오는 음악이 좋다. 스마트폰을 열어 Shazam을 터치한다. Shazam이 없었다면 알 수 없었을 그 음악의 이름을 알게 되는 기쁨. 공간을 감싼 채 유영하는 소리를 채취하여 폰 안에 담는 행위. 폰 안에 담긴 채 휘발되는 게 아쉬운 찰나, Shazam에 페이스북 버튼이 있다. 그걸 눌러서 페이스북 안에 담는다. 페이스북은 언제부턴가 나의 개인 아카이빙 공간이 되었다. 뭐든 그 안에 담아두게 된다. 그것이 생각이든, 떠돌아다니는 정보이든, 음악이든.. 뭐든지.. 페이스북 타임라인은 내게 있어 소셜 네트워크라기 보다는 대중들의 군무와 나만의 독무가 한데 어우러진 군독무의 공간. 그건 나만이 정의하는 나의 시간. 페이스북은 나에게 있어 '시간'이 되어간다. 공간을 채우는 정보를 인식하여 그것을 시간에 기록하게 되는 흐름. 굳이 음악 인식 기능의 문제라면 Shazam 외의 대안이 있으나 나에게 음악은 공간을 채우는 정보. 그 중에 나의 취향에 닿는 정보가 있으면 그걸 내 시간 안에 담고 싶었으니 Shazam에 보였던 페이스북 버튼은 내게 있어 나만의 욕구 충족의 솔루션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나는 음악이 좋게 들려오면 여지 없이 Shazam을 열게 된다. 공간 속에서 시간을 열고 시간과 공간을 만나게 해주고 그 교차지점에서 자신을 정의해 나가는 인간의 역할에 대해서 생각해 보게 된다. :) PS. 관련 포스트 페이스북, 군독 플랫폼이 되다. 군독무 Trackback Address :: http://read-lead.com/blog/trackback/19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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잃어버린 예술적 재능의 복원 :: 2013/08/09 00:09
블로그는 예술이다 포스트를 요즘 다시 되새기게 된다.
인간은 누구나 창의력과 예술가적 자질을 갖고 세상에 태어난다. 아기 시절에 인간이 보여주는 창의력, 예술가적 자질은 어른들의 환호 속에 힘을 받는다. 하지만 아기가 나이를 먹어 어린이가 되고 또 나이를 먹어 청소년, 어른이 되어가는 과정 속에서 인간은 자신에게 부여된 창의력, 예술가적 자질을 마음 편하게 펼치기엔 세상이 그리 녹록하지 않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주위의 정량화/표준화된 시선에 자신을 순응시키고 남들이 보기에 괜찮은 나, 남들과 비교해서 뒤떨어지지 않는 나를 유지하기 위해 속물적 노력을 경주하게 된다. 결국 자신에게 보여주기 위함이 아닌 타인에게 보여주기 위한 노력에 많은 에너지를 소모하게 되고 그렇게 하는 과정 속에서 나는 점점 나 자신의 색깔과 향기를 잃어간다. 자본주의 시장 체제에서 일종의 범용품과도 같은 모습으로 살아가게 되는 것이다. 예술가적 재능을 타고 났지만 그것을 제대로 살리지 못한 채 자존이 아닌 타존의 삶을 살아가기 쉬운 세상에서 The Black Ager님의 블로그는 예술이다 포스트는 나에게 큰 깨달음으로 다가왔다. '나'만의 생각과 경험을 나만의 언어로 표현하는 블로그 포스팅. 그건 나이를 먹으면서 잃어갔던 예술가적 재능을 복원시키는 활동인 것이다. 나를 읽고 표현하고 리드하는 과정 속에서 나는 더욱 나다워지고 그것이 나로 하여금 나를 더욱 읽고 표현하고 리드하게 하고. 이렇게 절묘한 예술의 무한 루프가 어디 있단 말인가. 문명이 발전할 수록 인간은 거대한 문명의 부품이 되어간다. 도구가 발전할 수록 도구는 인간의 몸과 마음 속에 침투하여 인간을 도구화시킨다. 부품으로 작동하고 도구로 기능하는 시간의 축적에 대항할 수 있는 유력한 방법 중의 하나가 예술을 수행하는 것이다. 예술을 하는 순간, 인간은 부품에서 완전체로 변신하고 도구에서 목적으로 격상한다. 예술하는 자는 문명을 부품화시키고 도구의 역습을 봉쇄한다. 모두가 이미 예술가이다. 다만 자신에게 내재한 예술가적 자질을 인지하는 자와 그렇지 못한 자로 나뉠 뿐이다. 또한, 나이를 먹으면서 예술가적 재능을 속절없이 잃어가는 자와 그것을 복원/증폭시키는 자로 구별될 뿐이다. 타인의 시선에 병적으로 집착하고 경쟁우위와 같은 헛된 환영에 눈이 멀고 속물적 스펙에 휘말리는 공장 통조림 같은 삶으로 일관하면 예술가적 면모의 복원은 요원해진다. 지금 이 순간 자신에게 물어봐야 한다. 최근에 내가 산출한 나만의 작품은 무엇인가? 나는 예술가이다. 내가 예술가라는 사실이 내겐 너무도 가슴 벅찬 설레임이고 그 충만한 기쁨은 쩐신이 지배하는 사회에서 쩐봇으로의 전락을 강요 받는 나에게 강력한 돌파구가 되어주고 있다. 블로그는 예술이다. 블로그는 예술 수행 플랫폼이다. 인간은 예술이다. 인간은 모두 예술가이다. ^^ PS. 관련 포스트 블로깅, 경영과 예술 질문 아끼기, 행동으로 답하기 Jam Reading 모두가 예술가다. 상품화 미켈란젤로의 조각에 대한 정의 - 창조주의 마음 Trackback Address :: http://read-lead.com/blog/trackback/15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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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요와 바탕 :: 2013/05/13 00:03
한 때 몸무게가 83kg에 달하던 시절이 있었다. 확실히 몸이 둔해지는 느낌이 들었고 건강상태도 좋지 않아져서 재작년 연말 건강검진 결과가 나쁘게 나왔다. 그러다가 작년 6월부터 정신을 차리고 몸을 챙기기 시작했다. 첨엔 운동을 열심히 했다. 계단 오르기와 엑스바이크를 정말 열심히 했다. 일주일에 거의 10시간 넘게 했던 것 같다. 그런데 생각만큼 살이 빠지질 않았다. 운동으로 살 빼는 것은 한계가 있겠다 싶어서 식단 쪽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아침은 황제처럼, 저녁은 거지처럼'이란 슬로건 하에 아침은 고기,야채를 배불리 먹었고 저녁은 야채 샐러드와 두유로만 배를 채웠다. 저녁에 밥을 먹지 않았다. 운동은 예전처럼 빡세게 하진 않고 가벼운 마음으로 기본적인 운동량을 유지하는 차원에서 물 흐르듯이 슬슬 했다. 그렇게 2개월 정도 하니까 몸무게가 73kg로 가벼워졌고 점차적으로 체중이 줄어들어 지금은 69kg대를 유지하고 있다.
그리고 최근에는 예전처럼 저녁에 야채만 먹지는 않는다. 가끔은 저녁에 고기도 배불리 먹고 밥도 많이 먹기도 한다. 그러면 체중은 1~2kg이 늘어난다. 심지어는 2~3일을 연속으로 야채 이외의 고칼로리 식단을 즐기기도 한다. 그러면 체중은 2~3kg이 불어난다. 그런데, 체중 증가는 그 때 뿐이고 이윽고 체중이 줄기 시작한다. 왜냐하면, 바탕에 채식이 깔려 있기 때문이다. 기본적으로 저녁 채식을 하고 가끔 일탈(?)을 하는 구조이기 때문에 일탈을 하면 잠깐 일탈의 대가를 치르게 되지만 일탈을 끝내면 어김없이 채식으로 컴백을 하게 되므로 몸은 결국 채식 생활이 이끄는 적정 체중의 세계로 인도를 받게 될 수 밖에 없다. 말하자면 요요현상이 일어나는 셈이다. 몸은 결국 바탕이 지향하는 구조로 회귀하게 되어 있다는. ^^ 결국 중요한 건 바탕에 무엇이 깔려 있는가이다. 몸의 바탕이 술에 쩔어 있는 상황에선 술을 끊어도 결국 술을 마시게 되어 있는 것이고 몸의 바탕이 육식에 젖어 있는 상황에선 채식을 해도 결국 육식으로 회귀하게 된다. 바탕은 습관에서 나온다. 지속되는 행동이 습관을 형성하고 습관은 바탕을 규정하기 이른다. 일단 바탕이 구성되면 바탕에 반하는 행위는 단순 일탈로 정의되는 것이고 단순 일탈은 결국 단순 회귀로 이어지게 된다. 요요 메커니즘의 하부 구조를 이해하면 일탈과 회귀를 반복하는 요요 놀이의 실체를 보다 명확하게 이해할 수 있다. 언제나 어김없이 발생하는 몸무게 하강의 요요 현상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바탕을 깐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를 새삼 인지하게 된다. "나의 바탕은 무엇으로 구성되어 있는가?"란 질문을 가끔 내게 던져볼 필요가 있다. 나의 바탕을 정기적으로 방문하고 나의 바탕을 구성하는 습관을 체크하고 나의 바탕 속에서 발생하는 일탈의 요동을 응시하다 보면 '나'라는 플랫폼을 앞으로 어떻게 기획/운영해 나갈 것인지에 대한 힌트를 얻을 수 있다. 체중감소 요요 현상은 정말 공식과도 같이 작동한다. 지금까지 일어난 체중 변화 곡선을 일종의 수학공식으로 풀어서 설명할 수 있을 지경이다. 정말 신기하고, 정말 당연하다. 그게 요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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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이스북, 군독 플랫폼이 되다. :: 2013/04/10 00:00
서비스를 정형화된 방식으로 사용하지 않고
나름 독창적인 방식으로 사용하는 재미가 제법 쏠쏠하다. 아주 우연한 계기로 올해 1월초부터 페이스북을 특이한 모습으로 사용하고 있다. 단초를 제공한 것은 메모장이었다. 일반적으로 제공되는 메모장 기능을 쓰면서 순간적으로 떠오르는 단상을 편하게 적고 싶었는데 이상하게 그게 잘 되지 않았다. 뭐랄까. 군무(群舞)와 독무(獨舞)를 둘 다 하고 싶은데 독무만 하려니까 심심했던 건지 이상하게 손이 잘 가질 않았다. 메모장에 수시로 들어가서 그 자체가 생각을 자극하거나, 생각이 떠오를 때 손이 바로 메모장으로 갈 수 있어야 하는데 둘 다 어색했다. 메모장에 들어가서 생각을 떠올리는 것도 껄끄러웠고 생각이 떠오르면 메모장을 실행하는 것도 불편했다. 에버노트가 괜찮긴 한데 그것도 어딘가 허전함이 있었다. 그러는 와중에도 트위터나 페이스북은 자주 들어가서 생각이 나면 글을 올리곤 했다. 그런데 트위터/페이스북의 경우, follower/친구들이 본다는 것을 의식할 수 밖에 없어서 생각을 어느 정도 정리해서 올리다 보니 수시로 마구 떠오르는 단상을 편하게 올리기는 힘들었고 무엇보다도 스팸 이슈로부터 자유로울 수가 없었다. 빈번하게 떠오르는 단상을 모두 옮기려면 순식간에 몇 십개의 포스팅을 할 수도 있는데 그렇게 했다간 주위에 민폐를 끼치게 되기 십상이니 아무래도 포스팅을 자제할 수 밖에 없었다. 메모장은 왠지 손이 안가고, 손이 잘 가는 페북/트위터는 글을 막 올릴 수가 없고. 메모장은 독무만 할 수 있어서 아쉽고, 페북/트위터는 군무를 위한 공간이어서 역시 20% 부족하고. 문득 질문이 떠올랐다. "내가 페북에 올리는 글들은 과연 남에게 보여주기 위해 적는 글인가?" 이건 즉답이 가능한 질문이었다. 대개 그렇지 않다. 내가 페북에 올리는 글들은 대부분 내 자신이 보기 위해 올리는 것이다. 남에게 보여주기 위한 글이 아닌 나의 생각을 내 자신에게 들려주기 위해 글을 올리는 경우가 훨씬 많았던 것이다. 그렇다면 굳이 페북에 올리는 글을 공개모드로 설정할 필요가 없는 것 아닌가? 도대체 지금까지 내가 뭔 짓을 했던 거지? ^^ 바로 실행에 옮겼다. 페북에 비공개 모드로 글을 올리기 시작했다. 그렇게 하니까 너무 편하고 좋았다. 군무와 독무를 모두 할 수 있게 되었다. 나는 분명 광장에 존재하는데 광장 속에서 혼자 만의 생각에 전념할 수 있는 공간을 확보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나만의 생각과 타인의 생각이 광장 속에서 함께 어우러지며 타임라인을 형성하는 모습이 제법 괜찮아 보였다. 군독무 공간의 탄생. 비공개 모드로 포스팅하니까 생각에 아무런 제약을 받지 않고 글을 마구 올릴 수 있게 되었다. 아무 생각이나 막 써도 되고 아무리 많이 올려도 스팸 부담도 없고. 메모장에 단상을 적는 게 왠지 뻘쭘했는데 페북에 올리니까 내 진솔한 생각에 집중할 수 있게 되고 덤으로 남의 생각도 같이 읽고 넘 좋다. 광장 속의 독방, 독방 속 광장. 광장과 독방이 뫼비우스의 띠를 형성하며 흘러가는 요상한 타임라인. 단지 공개모드를 비공개모드로 전환했을 뿐인데. ^^ PS. 관련 포스트 군독무 소셜 네트워크와 창의력 Trackback Address :: http://read-lead.com/blog/trackback/14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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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생과 기생 사이 :: 2013/04/01 00:01
나는 과연 온전히 하나인가? 내 안에서 상반되는 2가지 생각이 서로 다투고 갈등하고, 나도 모르는 사이에 뭔가에 홀린 듯이 감정의 파도에 휩쓸리고 합리적이지 못한 판단을 일삼고. 굳이 소설가적, SF적 상상력이 없어도 정신기생체란 말은 그닥 황당한 개념은 아닌 것 같다. 정말 내 안에 뭔가가 기생하면서 나를 끊임 없이 조종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란 생각이 가끔 드는 것이 사실이니까. 만약 내 정신 속에 뭔가가 정말 기생체의 형태로 존재한다면, 그건 나를 공격하는 적의 면모와 나 자신이란 자아의 면모를 모두 갖고 있는 것이다. 완전히 외부에서 내 안으로 유입된 유해하기만 한 존재라면 어떻게든 박멸하는 것이 답이겠으나 정신 기생체는 그렇게 무작정 적대적 대응을 하기만 해선 해결이 쉽지 않을 것이다. 부정적인 감정이 생길 때, 부정적인 감정에 사로잡힐 때, 부정적인 감정에 함몰되어 무기력해질 때.. 기생체에 의해 유린당한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한 편으론 내 안의 또 다른 나의 메세지가 나에게 전해지는 것이라고 간주할 수도 있겠다. 즉, 모든 감정을 일종의 자아 분열로 볼 수 있고 다양한 감정을 다양한 자아의 분열로 여기고 각각의 분열된 자아가 나에게 주는 느낌을 특정한 지향을 지닌 메세지라고 해석한다면 방향성은 자명해질 수 있다. 불안이란 감정이 생긴다면, 나는 나로부터 분열된 '불안' 자아가 나에게 무엇을 말하고 싶어 하는지를 해석하고 불안 자아와 대화하면서 나로부터 분열된 자아의 마음을 달래줄 수 있겠다. 그건 기생체라기 보다는 공생체에 가깝다고 봐야겠고, 나에게 공생적 메세지를 자신 만의 언어와 암호 형태로 나에게 발신하는 것이고 메세지를 수신한 나는 그 메세지에 적절하게 대응만 하면 되는 것이다. 문제는 메세지가 나에게 도달했는데 그 메세지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잘 모르는 상태에서 갈팡지팡, 좌충우돌 모드에서 벗어나지 못하면서 분열된 자아와의 커뮤니케이션이 단절되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공생의 의도로 보낸 메세지를 기생으로 오인하는 것이고 공생체를 기생체로 대우하거나 존재 자체를 인지 못하고 자아 혼란 상태에 빠지게 되면 나에게 보내진 메세지는 공중에 붕 뜬 채 갈 곳을 몰라 방황하게 되고 메세지를 받지 못한 나는 그로 인한 불이익을 어떤 형태로든 받게 된다. 만물은 메세지이다. 나는 분열을 거듭하는 역동적 자아이고, 분열된 자아는 끊임 없이 메세지를 나에게 발신한다. 나는 메세지이자, 메세지 발신자이면서 메세지 수신자이다. 나는 결코 혼자가 아니다. 분열된 자아하고 커뮤니케이션하는데만 평생이 소요된다. 분열된 자아와 어떻게 효과적으로 어우러지면서 친밀하게 소통할 것인가? 우연히 제목을 접하게 된 '정신기생체'란 책. 그 책을 읽지는 않았지만 그 책의 제목 하나를 갖고 이런 생각을 해볼 수 있어서 즐겁다. ^^ PS. 관련 포스트 만물은 메시지다. 폰봇 맘봇 고수, 알고리즘 Trackback Address :: http://read-lead.com/blog/trackback/14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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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모 포지셔닝 :: 2013/01/25 00:05나는 부계/모계 순도 100% 탈모 집안에서 태어났다. 20대 후반부터 슬슬 탈모 조짐이 보이더니 30을 넘기면서 탈모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고 30대 후반에 탈모가 급격히 진행되면서 40을 넘긴 지금은 이마라인 붕괴, 위에서 내려다보면 머리가 거의 다 빠진 완전 대머리의 반열에 들어서고 말았다. 딸내미가 초등학교 2학년인데 딸내미 초등학교에 방문하기가 살짝 미안하다. 딸내미 친구들이 딸내미를 놀릴 것 같아서. "야, 넌 아빠가 안 오시고 왜 할아버지가 오셨니?" 딸내미 친구들이 집에 놀러와서 내가 아빠인 것을 알고 만만치 않게 놀라는 표정을 보인다. 누구든 십 수년간 매일 아침 머리카락 200개가 지속적으로 빠진 경험을 해보지 않은 자 내 앞에서 탈모를 논하면 안 된다. ^^ 어제 5년 만에 만난 후배가 하는 말이 매우 인상적이다. "형, 머리가 다 빠지진 않았네요. 그래도 좀 남았네요." 모지? 이거 덕담인가? 탈모인으로서 확실한 포지셔닝을 보여야 할 때인가? 두피 관리를 받기 시작해야 할까? 아님 가발을 알아봐야 할까? 그것도 아님 확실하게 밀어버릴까? 뭐 하나 쉬운 선택이 없군. 이제 뭔가 색깔을 드러낼 때가 되기도 한 것 같은데 말이다. ^^ 포지셔닝을 확실하게 한다는 것. 취할 것을 분명히 취하고 버릴 것을 선명하게 버리는 것. 탈모에 있어서 나는 어떤 포지션을 취하는 것이 좋을까? 현재 어정쩡하게 얼마 안 남은 머리카락을 소중히 여기면서 한 올 한 올 보듬어가며 살아가고 싶다. 그냥 지금의 내 모습을 긍정하는 것이 내가 택할 수 있는 가장 떳떳한 포지션 아닐까? 여기서 뭔가 의미를 더하는 의도된 행위를 덧붙이는 것은 왠지 나답지 않은 느낌이다. 나는 탈모 집안에서 태어났고 탈모 계보를 확실하게 이어가고 있다. 나에게 주어진 DNA를 최대한 발현시키고 있는데 뭐가 그리 문제이겠는가? 내게 부여된 탈모 유전자가 잘 작동할 수 있도록 인프라를 잘 깔아주는 것. 그게 내가 취할 수 있는 플랫폼적 포지셔닝 아닐까? ^^ PS. 관련 포스트 탈모, 알고리즘 Trackback Address :: http://read-lead.com/blog/trackback/14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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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과 추상 :: 2012/08/15 00:05
고구마77님께서 귀한 댓글을 선물로 주셨다.
추상을 몸으로 체험하고 체험을 추상화하고 몸과 추상이 서로 대화할 때 몸은 더욱 몸스러워지고 추상은 더욱 고도화된다. 추상의 기원은 몸이고 몸의 기원은 추상이다. 서로가 서로의 본질이고 서로가 서로의 대화 대상이고 서로가 서로의 성장 플랫폼이 것이다. ^^ PS. 관련 포스트 덧셈과 곱셈 딸내미 수학시험 답안지 Trackback Address :: http://read-lead.com/blog/trackback/14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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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 연결놀이 플랫폼 :: 2012/06/11 00:01경제와 심리학을 연결하기. PS. 관련 포스트 직관해도 될 것을 분석하다. 창색, 알고리즘 투잡, 알고리즘 연결, 알고리즘 Trackback Address :: http://read-lead.com/blog/trackback/13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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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오래된 미래 :: 2012/06/01 00:01디스플레이의 미래 “AIR”, 증강현실로 Reality에 색을 입히다! 라는 글을 읽고 드는 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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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음 플랫폼, 페이스북 :: 2012/04/06 00:06페이스북은 거대한 관음 플랫폼이다. PS. 관련 포스트 공간 지각력 = 공간 창출력 담기와 담기기 관찰과 상상 The Soft-Wired Gene Trackback Address :: http://read-lead.com/blog/trackback/13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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앵버도 무섭고 페북도 무섭다. :: 2012/01/30 00:00앵그리버드, 2월부터 페이스북서 날갯짓을 읽고 나서.. 가끔 출퇴근 지하철 속에서 앵그리버드질을 하는 편이다.. 이젠 앵그리버드 중급자 정도의 실력은 갖춘 것 같다. 태블릿과 스마트폰을 오가며 앵그리버드질을 했는데 이젠 페이스북에서도 앵그리버드질을 하게 되겠구나. 초등학교에서는 앵그리버드질에 관한 내용으로만 일기를 쓰는 아이들도 꽤 있다고 한다. 앵버질하면서 날아가는 새의 힘이 조금만 더 셀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이제 난 페이스북에서 페이스북 크레딧으로 앵그리버드 아이템을 사게 되는 건가? PS. 관련 포스트 페이스북 웹 vs. 구글 웹 '타임라인'이란 이름의 감옥 real-time web의 늪 페이스북이 웹을 변형시키고 있다. Trackback Address :: http://read-lead.com/blog/trackback/13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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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의 이해 :: 2011/11/11 00:01
비즈니스북스의 이혜경님께서 보내주신 책이다. 책 제목으로 충분히 책 내용을 짐작할 수 있었다. 회사에서는 회사어로 소통해야 한다는 저자의 주장은 아래와 같이 10가지 유형의 회사어로 일목요연하게 정리가 되어 있다. 1. 긍정어 2. 세심어 3. 겸손어 4. 음성어 5. 조심어 6. 순차어 7. 정치어 8. 유희어 9. 공감어 10. 비전어 사람은 모두 자신만의 언어를 구사한다. 그래서 언어는 소통의 툴인 동시에 소통의 단절자이다. 자신만의 언어에 갇혀 사는 자와 타인의 언어를 이해하는 자 간의 소통 퀄리티 차는 매우 크다. 겸손과 공감은 비단 회사에서 뿐만 아니라 어떤 상황에서도 '언어'를 통한 소통의 원활한 작동을 가능케 하는 최고의 OS이다. 겸손/공감이란 OS를 장착하고 그것을 끊임없이 업그레이드시켜 나갈 수 있는 자는 자신이 처한 무수한 상황에 부합하는 최적의 언어들을 효과적으로 구사할 수 있는 진정한 언어인이라 할 수 있겠다. 겸손과 배려에서 긍정적인 태도, 사소한 것들을 세심하게 챙기는 모습, 오버하지 않는 신중함, 성과 극대화를 위한 네트워킹, 유희의 여유가 자연스럽게 나오게 되는 것이다. 언어는 이미 만들어져 있는 단어와 문법을 조합한 메시지를 단순히 주고 받는 과정에 불과한 것이 아니다. 언어는 삶에 대한 자신의 태도, 나 자신의 정체성을 표출하고 타인의 정체성을 담은 메시지에 반응하는 '존재의 커뮤니케이션', '삶의 커뮤니케이션'인 것이다. 자신을 낮추고 타인의 마음에 공감할 수 있는 능력은 '존재/삶의 능력'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니까. ^^ Trackback Address :: http://read-lead.com/blog/trackback/12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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