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애 :: 2019/01/09 00:09페이스북을 무심코 둘러보다가 연애에 대해서 자신의 생각을 피력하는 어떤 동영상을 보게 되었다. 참 공감이 간다 그리고 이런 생각이 든다. 연애란 건 사랑이란 건 결국 상대방과의 관계를 빌려서 나 자신과 연애하고 나 자신을 사랑하는 행위라는 것.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건 결국 누군가에 투영된 자신의 모습을 사랑한다는 것일수 있다. 누군가는 매개체일 뿐 사랑은 결국 나 자신을 향한 행위에 불과할 수 있다. 그래서 계속 사랑의 대상을 향해 내가 꿈꿔 왔던, 내가 바람직하다고 생각하는 상을 덧씌운다. 그렇게 입혀진 '나'라는 이름의 외피를 상대방은 어떻게든 소화해야 하는 것이고 나도 그런 역할을 수행해야 하고 결국 각자 자기 자신을 사랑하고 있는 과정 속에 상대방이란 역할을 빌려주고 있는 것이다. 그건 참으로 드라마틱한 프로세스다. 정확히 볼 수 있다면 상대방에 입혀진, 투영된 나 자신의 모습을 발라낼 수 있다면 그리고 남는 것이 있긴 한건지에 대해서 선명하게 응시할 수 있다면 연애.. 사랑.. 그것의 실체가 드러날 수 있겠다.. ㅎ Trackback Address :: http://read-lead.com/blog/trackback/24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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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레이리스트 :: 2016/05/18 00:08
맘에 드는 음악이 어디선가 들려올 때 Shazam을 즐겨 사용한다.
Shazam으로 음악을 인식해서 그 음악이 뭔지 알아내는 즐거움이 제법 쏠쏠하다. 그런데, 그 기능을 자주 이용하다 보니 욕심이 진화하게 된다. 이젠 단순한 음악 인식에 그치지 않고, 그냥 들려오는 음악을 자동으로 인식해서 플레이 리스트에 담아주면 좋겠다는 요구사항이 생긴다. 커피전문점에 앉아 있으면 어떨 때는 들려오는 음악들이 무더기로 좋은 경우가 있는데 그 경우엔 매번 Shazam을 터치하는 것도 고역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1. 커피전문점에서 연신 저격해대는 나의 취향과 2. Shazam의 터치 기능과 3. Shazam에서 인식한 음악을 페이스북에 저장해 두는 경험이 서로 만나고 연결되면서 오토 플레이 리스트에 대한 필요가 생겨났다. 한 곡을 겨냥 터치해서 인식하는 게 아니라 특정 장소를 겨냥한 Shazam 터치를 통해 특정 공간에서의 일정한 길이의 시간 전체를 인식하는 기능이 필요하다. 뮤직 플레이 리스트는 철저히 개인화된 내용이자 구조. 그걸 얼마나 편하게 생성하게 해주고 그것이 다음 번 플레이로 자연스럽게 이어질 수 있는 흐름이 나온다면 음악은 또 다른 국면으로 진화할 기회를 잡게 될 것 같다. 시간과 공간을 채색할 수 있는 색채로서의 음악. :) Trackback Address :: http://read-lead.com/blog/trackback/19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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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hazam :: 2016/05/16 00:06
스타벅스에서 아메리카노를 마신다.
들려오는 음악이 좋다. 스마트폰을 열어 Shazam을 터치한다. Shazam이 없었다면 알 수 없었을 그 음악의 이름을 알게 되는 기쁨. 공간을 감싼 채 유영하는 소리를 채취하여 폰 안에 담는 행위. 폰 안에 담긴 채 휘발되는 게 아쉬운 찰나, Shazam에 페이스북 버튼이 있다. 그걸 눌러서 페이스북 안에 담는다. 페이스북은 언제부턴가 나의 개인 아카이빙 공간이 되었다. 뭐든 그 안에 담아두게 된다. 그것이 생각이든, 떠돌아다니는 정보이든, 음악이든.. 뭐든지.. 페이스북 타임라인은 내게 있어 소셜 네트워크라기 보다는 대중들의 군무와 나만의 독무가 한데 어우러진 군독무의 공간. 그건 나만이 정의하는 나의 시간. 페이스북은 나에게 있어 '시간'이 되어간다. 공간을 채우는 정보를 인식하여 그것을 시간에 기록하게 되는 흐름. 굳이 음악 인식 기능의 문제라면 Shazam 외의 대안이 있으나 나에게 음악은 공간을 채우는 정보. 그 중에 나의 취향에 닿는 정보가 있으면 그걸 내 시간 안에 담고 싶었으니 Shazam에 보였던 페이스북 버튼은 내게 있어 나만의 욕구 충족의 솔루션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나는 음악이 좋게 들려오면 여지 없이 Shazam을 열게 된다. 공간 속에서 시간을 열고 시간과 공간을 만나게 해주고 그 교차지점에서 자신을 정의해 나가는 인간의 역할에 대해서 생각해 보게 된다. :) PS. 관련 포스트 페이스북, 군독 플랫폼이 되다. 군독무 Trackback Address :: http://read-lead.com/blog/trackback/19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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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맷 우선 :: 2015/03/23 00:03
페이스북으로 정보를 소비하는 게 편하다.
그냥 그런 포맷으로 뭔가를 소비하는 게 편하다. 내용보다 포맷에 더 민감해진 듯 하다. 모바일 시대에 접어들면서 포맷 민감도가 급격하게 올라간 느낌이다. PC를 주로 쓰던 시절과 달리 모바일을 주로 사용하는 상황에선 집중력이 매우 희소한 자원이라는 사실에 입각한 포맷이 우선적으로 고려되기 마련이다. 산만한 집중력으로도 어느 정도 소비를 해내는 듯한 정서적 안정감을 주는 파편화된 포맷. 어느 상황에서도 가볍게 소화할 수 있는 스낵같은 만만함. 포맷을 정하고 그 포맷에 맞는 컨텐츠를 공급해야 먹힐 수 있는 건가. ^^ Trackback Address :: http://read-lead.com/blog/trackback/18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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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이스북, 마음 속 여행의 공간 :: 2014/11/28 00:08
페이스북을 볼 때마다 드는 생각.
여기에 올라오는 글이 사람의 글일까? 기계의 글일까? 분명 사람의 글이란 외양을 하고 있으나, 이건 사람의 윤곽을 뒤집어 쓴 기계가 써내려가는 글이 아닐까? 사람이 쓴다고는 하지만 기계적 프레임 속에서 사람이 쓴 글이니 기계의 글이라고 봐도 무방하지 않을까? 사람들은 페이스북에서 사람들과 소통하고 있다고 착각하지만 실상은 기계와 기계 간의 소통이고 사람들은 뒷전에 물러나 있는 것은 아닐까? 기계 간의 소통인지, 사람 간의 소통인지.. 여튼 페이스북에는 기계 또는 사람의 마음이 결을 타고 흐른다. 페이스북을 들여다 보면 내 마음의 흐름도 알 수 있고 (내 마음의 탈을 쓴 기계 마음의 흐름인지도) 다른 사람들의 마음 흐름도 살짝 느껴볼 수 있다. 페이스북. 마음 속 여행의 공간이다. ^^ Trackback Address :: http://read-lead.com/blog/trackback/17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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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리퀄 :: 2014/04/09 00:09
트위터,페이스북엔 수시로 분절된 피드들이 타임라인 형태로 흘러간다.
그런 피드들이 축적되고 구조화된 것이 블로그 포스트. 아무리 봐도 트위터,페이스북은 블로그의 프리퀄인 듯. 블로그 포스트는 책의 프리퀄이다. 페이스북, 트위터는 블로그의 프리퀄이다. 블로그는 책과 페북/트위터의 중간 지점에서 책과 트위터/페북을 이어주는 매개체적 입지를 갖고 있다. 블로깅을 한다는 것의 의미는 현재 10%도 이해되지 못하고 있는 듯 하다. 세상은 수많은 프리퀄들의 범람으로 점철되어 간다. 새로운 것들이 고작 프리퀄에 불과한 것이고, 미래는 프리퀄들로 새로운 듯이 채워져 간다는 것. 블로그가 올드한 것으로 보이는 지금, 블로그와 찰떡 궁합이었던 검색도 역시 올드하다. 하지만 검색 이외의 것들이 난무하는 지금, 검색은 올드하기만 한 건 아니다. 비검색의 영역이 넓어질 수록 검색은 새로운 의미를 향해 이동하게 된다. 디스커버리. 그건 우연한 발견이 아니다. 필연적 디스커버리. 검색이 앞으로 구현해야 할 과업이다. PS. 위 트윗에 대한 윤하님의 통찰력 있는 멘션 기억체계도 연상되네요. 책--<장기기억>--<작업기억(단기기억)>--트위터/페이스북, 프리퀄이란 말에서는 '그 아이는 아버지를 선언해야 했어. 이를테면 아이는 나무보다 더 나이가 많은 열매였던 셈이지'라던 융의 구문도 떠오르구요 :) 언뜻 이런 구조가 연상됩니다. (공간)--책--블로그--트위터/페이스북--(시간), 과학이 발달하면 물질이 인간과 닮게 되는 걸까요? :) Trackback Address :: http://read-lead.com/blog/trackback/16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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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트리밍 :: 2014/04/04 00:04
음악은 이미 스트림이 소비 방식의 대세가 되어 있다. 회원가입되어 있는 음악 사이트에 가서 원하는 음악을 수시로 스트리밍 청취한다. 시간의 흐름에 귀를 맡기고 음악을 소비하는 모습.
동영상도 마찬가지. 스트림 기반의 소비는 일상 속에 깊이 침투된 상태. 그리고 텍스트. 페이스북, 트위터는 타임라인이란 포맷 기반으로 정보를 소비하는 플랫폼을 작동시키고 있다. 잘게 파편화된 정보들이 시간의 흐름을 따라 등장하고 사라져간다. 시간의 흐름을 타고 가볍게 유통되기에 적당한 분절형 정보들은 페이스북,트위터의 등장으로 인해 나름의 빛을 발하게 되었다. 타임라인이란 포맷. 스트리밍 메커니즘이 잘 작동하는 상황에선 힘을 발휘한다. 하지만 스트리밍에 어울리지 않는 컨텐츠 구조에선 타임라인형/카드형 포맷이 잘 먹히긴 힘들다. 정보는 다양한 소비 메커니즘에 의해 분류되는 것이고 각자의 컨텍스트에 맞는 포맷을 만나야 최적화된 소비가 가능해진다. 페이지와 플레이 링크와 피드 에디팅과 스트리밍 미래의 정보는 플레이되는 페이지 피드되는 링크 에디팅되는 스트림 뭐 이런 식으로 forming 될 것 같다. 그리고 그런 진화의 과정 자체가 거대한 스트림의 형태로 vibrating 될 것 같다. ^^ PS. 관련 포스트 링크 vs. 피드 Contact Economy 나는 Container Economy를 살아가고 있다. Stream Economy가 도래하다. Trackback Address :: http://read-lead.com/blog/trackback/16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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횡설수설 :: 2013/08/07 00:07橫 가로 횡, 說 말씀 설, 竪 세울 수, 說 말씀 설 말을 이렇게 했다가 저렇게 했다가 하다, 두서가 없이 아무렇게나 떠드는 것 시간과 쿠키란 제목의 포스트를 그야말로 횡설수설하며 올려 보았다. 보통 포스트를 올릴 때는 전체적인 흐름이나 논리적 구조 등을 아주 미약하게나마 챙기기 마련인데 시간과 쿠키 포스트에서는 그런 것들을 완전 무시하고 그냥 손가락 가는대로 글 가는대로 맡겨 놓고 마구 휘갈겨 보았다. 페이스북을 군독 플랫폼으로 활용하기 시작하면서 오타의 미학을 느끼게 되었고 오타를 남발하면서 FEEL을 받다 보니 이제 횡설수설까지 즐기게 된 모양새인데.. 이게 은근 짜릿한 맛이 있다. 글을 쓸 때 느끼게 되는 압박감에서 벗어나는 자유의 느낌이 있다. 정돈되지 않은 모양새로 마구 글을 적다 보니 머리가 혼란스러워질 것 같지만 오히려 머리가 맑아지는 느낌이 난다. 질서 정연한 글이 되게 하기 위해 뇌를 고문하는 과정이 없다 보니 오히려 뇌가 편안해진 상태에서 횡설수설 문장들을 남발하면 할수록 뇌가 자유롭게 비상하는 솔개와도 같은 플로우감 충만한 모드에 돌입하게 되는 것 같다. 무질서한 글을 배설하면서 마음 속에 질서가 차오르는 느낌. 가끔은 이렇게 횡설수설하면서 뇌를 가볍게 해주는 놀이를 즐길 필요가 있겠다. 오타와 횡설수설. 올해 들어서 알게 된 은밀한 기쁨이라고 할까. 요넘들과 친하게 지낼수록 '나'라는 넘이 더욱 풍요로워질 것 같다. 항상 글을 다듬으려고 노력하는 과정에서 나도 모르게 내 뇌에 특정한 결을 새기게 되고 그 결이 고정 경로로 굳어지면서 생각의 다양성 측면의 제약을 받게 되기 쉬운데 정기적으로 횡설수설을 하게 되면 나도 모르는 내 안의 새로운 생각 결을 발견하게 되고 그 결을 따라 새로운 경로를 개척해 나갈 수 있다면 횡설수설은 매우 값진 생각 발굴 엔진으로 자리잡게 될 것이다. 강제로라도 손가락을, 머리를, 뇌를 횡설수설 시켜보자. 횡설수설하면 할수록 예전과 다른 새로운 나로 변모해 가는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 PS. 관련 포스트 시간과 쿠키 페이스북, 군독 플랫폼이 되다. 오타의 미학 Trackback Address :: http://read-lead.com/blog/trackback/15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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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타의 미학 :: 2013/04/22 00:02남을 생각하지 않고 혼자 만의 글을 쓸 때에는 문법이나 오타에 크게 구애받지 않고 글을 막 적곤 한다. 그런데, 문법을 무시하고 오타가 나도 신경을 쓰지 않고 글을 마구 적다 보면 나름 그것 자체가 생각의 자유로운 흐름을 원활하게 해준다는 느낌을 받게 된다. 문법에 신경 쓰느라 글의 내용보다는 글의 형식을 더 챙기게 되고 오타를 신경 쓰다가 글의 의미에 집중하지 못하고 글의 규격에 주의력이 분산되는 상황에서 벗어나게 된다고나 할까. 마구 글을 써나가는 것의 장점이 의외로 쏠쏠하다는 것을 최근에서야 비로소 알게 되었다. Trackback Address :: http://read-lead.com/blog/trackback/15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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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이스북, 군독 플랫폼이 되다. :: 2013/04/10 00:00
서비스를 정형화된 방식으로 사용하지 않고
나름 독창적인 방식으로 사용하는 재미가 제법 쏠쏠하다. 아주 우연한 계기로 올해 1월초부터 페이스북을 특이한 모습으로 사용하고 있다. 단초를 제공한 것은 메모장이었다. 일반적으로 제공되는 메모장 기능을 쓰면서 순간적으로 떠오르는 단상을 편하게 적고 싶었는데 이상하게 그게 잘 되지 않았다. 뭐랄까. 군무(群舞)와 독무(獨舞)를 둘 다 하고 싶은데 독무만 하려니까 심심했던 건지 이상하게 손이 잘 가질 않았다. 메모장에 수시로 들어가서 그 자체가 생각을 자극하거나, 생각이 떠오를 때 손이 바로 메모장으로 갈 수 있어야 하는데 둘 다 어색했다. 메모장에 들어가서 생각을 떠올리는 것도 껄끄러웠고 생각이 떠오르면 메모장을 실행하는 것도 불편했다. 에버노트가 괜찮긴 한데 그것도 어딘가 허전함이 있었다. 그러는 와중에도 트위터나 페이스북은 자주 들어가서 생각이 나면 글을 올리곤 했다. 그런데 트위터/페이스북의 경우, follower/친구들이 본다는 것을 의식할 수 밖에 없어서 생각을 어느 정도 정리해서 올리다 보니 수시로 마구 떠오르는 단상을 편하게 올리기는 힘들었고 무엇보다도 스팸 이슈로부터 자유로울 수가 없었다. 빈번하게 떠오르는 단상을 모두 옮기려면 순식간에 몇 십개의 포스팅을 할 수도 있는데 그렇게 했다간 주위에 민폐를 끼치게 되기 십상이니 아무래도 포스팅을 자제할 수 밖에 없었다. 메모장은 왠지 손이 안가고, 손이 잘 가는 페북/트위터는 글을 막 올릴 수가 없고. 메모장은 독무만 할 수 있어서 아쉽고, 페북/트위터는 군무를 위한 공간이어서 역시 20% 부족하고. 문득 질문이 떠올랐다. "내가 페북에 올리는 글들은 과연 남에게 보여주기 위해 적는 글인가?" 이건 즉답이 가능한 질문이었다. 대개 그렇지 않다. 내가 페북에 올리는 글들은 대부분 내 자신이 보기 위해 올리는 것이다. 남에게 보여주기 위한 글이 아닌 나의 생각을 내 자신에게 들려주기 위해 글을 올리는 경우가 훨씬 많았던 것이다. 그렇다면 굳이 페북에 올리는 글을 공개모드로 설정할 필요가 없는 것 아닌가? 도대체 지금까지 내가 뭔 짓을 했던 거지? ^^ 바로 실행에 옮겼다. 페북에 비공개 모드로 글을 올리기 시작했다. 그렇게 하니까 너무 편하고 좋았다. 군무와 독무를 모두 할 수 있게 되었다. 나는 분명 광장에 존재하는데 광장 속에서 혼자 만의 생각에 전념할 수 있는 공간을 확보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나만의 생각과 타인의 생각이 광장 속에서 함께 어우러지며 타임라인을 형성하는 모습이 제법 괜찮아 보였다. 군독무 공간의 탄생. 비공개 모드로 포스팅하니까 생각에 아무런 제약을 받지 않고 글을 마구 올릴 수 있게 되었다. 아무 생각이나 막 써도 되고 아무리 많이 올려도 스팸 부담도 없고. 메모장에 단상을 적는 게 왠지 뻘쭘했는데 페북에 올리니까 내 진솔한 생각에 집중할 수 있게 되고 덤으로 남의 생각도 같이 읽고 넘 좋다. 광장 속의 독방, 독방 속 광장. 광장과 독방이 뫼비우스의 띠를 형성하며 흘러가는 요상한 타임라인. 단지 공개모드를 비공개모드로 전환했을 뿐인데. ^^ PS. 관련 포스트 군독무 소셜 네트워크와 창의력 Trackback Address :: http://read-lead.com/blog/trackback/14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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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 응시 :: 2013/02/01 00:01
나는 무엇을 응시하는가? 내 시간의 대부분은 무엇을 응시하는데 사용되고 있을까? 돈? 명예? 권력? 우월? 안전? 감정? 그런 것들에 소비되는 시간은 과연 가치 있는가?
돈을 응시하고 그것을 동경하면 어떤 모습이 벌어지는가? 돈을 follow하면 매일 돈에 관한 근심,걱정,불안이 나의 마음 속으로 feed된다. 트위터,페이스북 앱을 실행하고 끊임없이 타임라인에 출몰하는 정보들을 기계적인 손놀림으로 스캐닝하는 로봇스런 사용자 행동과 별반 다를 것 없는 상황이 연출될 것이다. 마음은 온통 돈에 관한 피드로 범람할 것이고 그 피드들을 제대로 소화하지도 못한 채 시간은 하염없이 흘러갈 것이다. 명예도 권력도 우월도 안전도 다 마찬가지이다. 뭔가를 바라게 되면 그것에 관한 불안이 자생적으로 성장하게 되면서 끊임없이 마음 속 타임라인을 장악하게 된다. 단지 하나의 단어일 뿐인데 그 단어가 자행하는 타임라인 난자의 수준은 정말 무자비할 지경이다. 어떤 대상을 응시하는 것은 인간으로 살아가는 한 결코 회피하기 어려운 본능에 가까운 몸짓이다. 응시하라고 디자인된 몸을 갖고 태어나서 어떻게 응시하지 않고 살아갈 수 있겠는가?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마음 속 타임라인을 온통 그런 쓰레기 같은 피드 정보들로 가득 채우고 살아가는 건 생을 영위하는 자로서 매우 자존심 상할 수 있는 일이다. ^^ 마음이란 이름의 타임라인. 마음 자체를 응시해 보자. 내 마음 속에 지금 무엇이 피드되고 있는지 살펴보자. 지금 이 순간 내 마음 속에 무심코 피드된 정보가 나의 어떤 follow 행위에서 비롯된 것인지 근원을 추적해 보자.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내가 follow한 것에 관한 정보가 내 마음 속에 들어오는 것이지 내가 follow하지 않은 테마는 결코 내 안에 피드를 형성할 수가 없다. 내 마음 속 타임라인은 철저히 내가 선택한 것들로 가득 채워지는 것인데 그 모습을 응시하지 않고 그저 피드된 정보들에 의해 내가 속절없이 좌지우지되는 것은 매우 허무한 일이다. 가끔은 내 마음 속에 무차별적으로 들어오는 피드들 중에 영 아닌 것은 unfollow를 시도할 필요가 있다. 물론 그게 쉽지는 않겠지만 말이다. follow만 하고 unfollow를 하지 않으면 타임라인은 오염에 오염을 거듭할 수 밖에 없다. 오염을 막기 위해서는 타임라인을 stock이 아닌 flow의 상태로 유지해야 한다. 타임라인 플로우의 신선도를 유지하기 위해 내가 팔로우한 테마들을 쭉 점검해 보자. 그 중에 나를 유독 무기력하게 만드는 테마가 있다면 그로 인해 내 마음은 무척 혼란스런 상태에 놓여 있을 것이다. 내 마음을 응시하고 내 마음을 힘들게 만드는 테마를 찾아내는 노력. 너무나 vulnerable한 마음 타임라인에 한 줄기 희망을 제시하는 몸짓이 될 것이고 그로 인해 바뀌어 가는 나의 모습은 마음 피폐화 시대를 거스르는 리버스엔트로피적인 변혁의 단초가 될 것이다. 하루에 단 5분이라도 나의 마음을 응시하는 것. 길을 잃고 헤매는 현대인들에겐 너무나 소중한 시간일 수 밖에 없다. 세상은 정확히 두 종류의 사람으로 양분된다. 마음을 응시하는 자와 마음을 응시하지 않는 자로 말이다. ^^ PS. 관련 포스트 '타임라인'이란 이름의 감옥 내가 나를 뒤에서 지켜보는 느낌 맘봇 마음 건축 Trackback Address :: http://read-lead.com/blog/trackback/14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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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길이가 줄었어요 :: 2012/09/17 00:07
트위터류의 서비스를 많이 사용하게 되면서 긴 글을 쓰기가 어려워졌다는 얘기를 많이 듣게 된다. 단지 긴 글을 쓰기 어려워진 게 아니라 짧은 글을 주로 적다 보니 생각 조차 짧아졌다는 얘기도 종종 듣는다. 이런 얘길 듣다 보면 미디어가 인간의 생각 기제에 깊은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이구나란 느낌을 은연 중에 받게 되기도 한다.
그런데.. 정말 그런 것일까? 트위터가 흥하면서 토막글 쓰기가 유행한 것은 사실이지만 토막글의 붐업이 깊이 있는 생각을 저해하고 있는 것일까? 난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 생각은 표현으로만 구성되지 않기 때문이다. 생각을 표현하려고 애쓰지만 결코 생각을 글로 다 옮길 수는 없다. 짧은 글이든 긴 글이든 생각의 일부를 옮긴 것이고 나머지 절반은 생각의 수면 아래로 잠복하기 마련이다. 긴 글을 썼다고 생각이 깊고 짧은 글을 썼다고 생각이 짧은 것은 결코 아니다. 오히려 툭 던진 짧은 글 하나가 훨씬 더 깊은 생각 빙산의 일각일 수 있다. 눈에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니라 눈에 보이는 것과 눈에 보이지 않는 것 간의 관계가 중요하다. '나의 글이 짧아졌음'의 의미를 잘 생각해 봐야 한다. 글이 짧아졌다는 것은 글의 흐름 보다는 글의 포인트에 집중한다는 얘기다. 흐름과 포인트는 각자 나름의 가치를 가지고 있는 것이지 깊이나 퀄리티 측면에서 둘 사이의 우열을 가리기는 어렵다. 각자 자신에게 편리한 도구를 사용한다는 관점에서 긴 글과 짧은 글을 바라보면 된다. 두 가지 도구 중 하나만 사용해도 좋고 둘 다 사용해도 좋다. 컨테이너는 분명 중요한 장치이다. 하지만 컨테이너가 모든 것을 다 해줄 것이란 믿음은 불필요하다. 컨테이너에 의존하려는 생각이 컨텐츠 부실을 낳는 것이지 컨테이너를 이용하려는 의도를 잃어버리지 않는 한 컨테이너는 조력자의 위치에서 벗어나기가 어렵다. 컨테이너를 지배자로 만드는 것은 컨테이너를 바라보는 자의 수동적 태도인 것이다. 눈에 보이는 것에 경도되지 말아야 한다. 내가 쓴 글이 짧은 글이든 긴 글이든 상관없이 내가 적은 글이 온전히 표현하지 못하고 있는 나의 생각이 무엇인지에 몰입할 필요가 있다. 짧은 글 한 줄과 그 한 줄의 기저에 깔려 있는 내 생각의 빙산이 진동하고 있음을 들어야 한다. 글은 시각 매체일 뿐 아니라 청각 매체이기도 하다. 씌어진 글을 읽고 씌어진 글의 이면에서 일어나는 잠재된 생각의 진동을 들어야 한다. 그걸 듣는 훈련을 거듭하면 할수록 짧은 글이 짧은 생각이 아님을 이해하게 된다. "글 길이가 줄었어요."란 말 속에 길이 이상의 의미를 담지 말아야 한다. 우리의 생각은 예전이나 지금이나 우주와도 같은 광활한 넓이와 진폭으로 숨쉬고 있는 것이고 우린 그것을 어제보다 오늘, 오늘보다 내일 더 많이 이해하게 될 것이다. 내가 적은 짧은 글 하나. 우습게 보이는 그 토막 글이 사실은 거대한 우주인 것이다. ^^ PS. 관련 포스트 쇠락 속 가치 발현, 블로그 한확, 알고리즘 제약과 자유 Trackback Address :: http://read-lead.com/blog/trackback/14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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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산과 소비 :: 2012/06/20 00:00소셜 네트워크는 생산물을 나누고 거기서 부차적인 생산/소비가 동시다발적으로 발생한다. 이제 생산은 소비의 대상이 되어가고 있다.
소비는 더 이상 생산물의 일방적 수용에 그치지 않는다. 생산물에 끊임없이 피드백을 가하고 그 피드백은 새로운 생산물로 소비자에게 다가온다. 소비한다는 것은 결국 뭔가를 생산하고 있다는 의미이다. 소비를 통해 의도를 표현하고 소비를 통해 정체성을 드러낸다. 이제 소비는 생산의 대상이 되어가고 있다.
생산과 소비는 원래 하나였다. 그저 편의상 지금까지 서로 상반된 의미로 나눠져서 사용되었을 뿐이다. 생산과 소비가 형성하는 뫼비우스 열차에 우리는 이미 탑승하고 있다. 그 열차가 우리를 어디로 데려갈 지는 우리가 얼마나 탑승 스킬을 발휘할 지에 달려 있다. PS. 관련 포스트 프로슈밍 플랫폼 = 트위터/페이스북 소비자는 무엇을 원하는가? 독저, 알고리즘 Trackback Address :: http://read-lead.com/blog/trackback/13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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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의 탑을 정주행하다 :: 2012/05/02 00:02
개인적으로 만화를 거의 보지 않는다.
2000년 이후에 만화를 본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랬던 나인데. 최근에 우연히 '신의 탑'이란 웹툰을 알게 되었다. 호기심이 생겼다. 예전 같으면 호기심이 생겼다는 이유 만으론 만화를 보기가 쉽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스마트폰이 존재하기 때문에 별도의 시간을 내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만화를 볼 수 있는 시공간이 허락된다. 전철을 타고 다니면서 만화를 봤다. 화장실에서 볼 일을 보면서 만화를 봤다. 내 일상에 전혀 부하를 주지 않으면서 만화를 봤다. 결국 정주행을 시작한지 일주일 만에 다 봐버렸다. 그리곤 생각했다. 1~2년 후에 정주행을 시작해도 좋았을 걸. 신의 탑을 정주행하는 만화 주인공의 행보. 전철,화장실,짜투리시공간에서 스마트폰으로 뭔가를 정주행하는 나의 행보. 뭔가를 처음부터 끝까지 쭈욱 정주행한다는 것. 스마트폰의 등장으로 트위터/페이스북 타임라인에 올라오는 스트리밍형 컨텐츠를 짧게 짧게 소비하는 행태에 젖어 있다 보니 정주행이란 단어는 그동안 내게 너무나 어색한 개념이었던 것 같다. 하지만, 금번 신의 탑 정주행을 통해 컨텐츠 아카이빙의 창고를 처음부터 쭉 훑어 나가는 재미를 새삼 느끼게 되었다. 트위터/페이스북 타임라인의 짧은 글들을 소비하다 보니 정주행 방식의 컨텐츠 소비의 맛이 더욱 깊게 느껴진다고나 할까. 신의 탑으로 인해 스마트폰으로 뭔가를 정주행한다는 것이 가능하다는 것을 인지하게 되었다. 사실 e-book도 대표적인 정주행 대상이긴 하지만, 책을 원체 잘 읽지 않다 보니 이북을 가까이할 기회는 그닥 많지가 않았는데 신의 탑을 통해 '정주행'이란 단어를 제대로 의식하게 된 셈이다. 분절화된 컨텐츠의 속절없는 생성과 휘발로 범람하는 타임라인 속을 살아가면서, 느긋하고 차분하게 뭔가를 정주행할 수 있다는 것은 매우 희소가치가 있는 행위이다. 타임라인 속에서 조각조각 흩어지기 쉬운 사고 패턴도 정주행스럽게 가다듬어야 하겠구나란 반성도 같이 해보게 된다. 신의 탑을 정주행하는 주인공의 모습을 보면서 나도 신의 탑을 정주행하게 되었고 앞으로 정주행 모드를 내 일상 속에 더 많이 확산시킬 수 있겠다는 희망을 얻게 되어 나름 기쁘다. 최근 2~3년 동안 수동적으로 피드 기반의 타임라인을 소비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권태를 느끼게 된다. 이젠 나만의 타임라인을 좀더 능동적으로 구성해 나가야겠다. 최신 업데이트 기반의 타임라인이 아닌 시간의 흐름을 내가 직접 정의하고 내가 구성한 시간의 흐름 속에서 나만의 순서로 정보를 소비하고 나만의 플로우로 생각을 전개해 나가는 것. 신의 탑에서 배운 행동지침이다. 타임라인이란 이름의 감옥. 타임라인이란 이름의 자유. 감옥과 자유는 타임라인을 대하는 태도에 의해 결정되기 마련이다. ^^ PS. 관련 포스트 '타임라인'이란 이름의 감옥 Trackback Address :: http://read-lead.com/blog/trackback/13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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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음 플랫폼, 페이스북 :: 2012/04/06 00:06페이스북은 거대한 관음 플랫폼이다. PS. 관련 포스트 공간 지각력 = 공간 창출력 담기와 담기기 관찰과 상상 The Soft-Wired Gene Trackback Address :: http://read-lead.com/blog/trackback/13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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