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윗 리믹스 :: 2014/04/14 00:04
트위터를 읽는다.
트위터에 올라오는 수많은 트윗의 스트림. 그것들을 수동적으로 5년 간 읽어온 것 같다. 수년 간 트윗을 읽어오다 보니 이런 생각이 든다. 내가 읽고 싶은 사람의 트윗만 팔로우 기반으로 읽는다는 것. 사람을 먼저 정하고 그 사람이 생산하는 글을 읽는다는 것. 여러 사람들의 생각이 랜덤하게 올라오는 공간. 내가 선택한 사람들의 생각들을 시간의 흐름 순으로 볼 수 있는 경험. 그건 정말 대단한 권리의 탄생인 것 같다. 그냥 일상 속에서 흔하게 할 수 있는 행위가 되어버린 트윗 읽기. 그건 새로운 생각의 탄생이 언제든 발생할 수 있는 최적의 생각 리믹스 플랫폼이 아닐까. 내가 선택한 사람들의 글을 읽는다는 건, 내가 좋아할 수 있는 글들이 최대한 많이 올라올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해 놓고 그 공간 안에 피딩되는 정보를 접하는 것이다. 좋아한다는 건, 수동적 소비이자 능동적 생산이다. 소비와 생산이 절묘하게 공존하는 공간 속에서 나는 좋아하는 것들을 지속적으로 경험하게 된다. 취향은 진화한다. 내가 흥미를 느낄 수 있는 생각을 많이 하는 사람들의 글을 읽다가 보면 여러 생각들이 내 안에서 재조합되는 경험을 자연스럽게 하게 된다. 처음엔 내가 팔로우하는 사람들의 생각 흐름에 의존하기 마련이지만 점차적으로 의존도는 줄어들 수 밖에 없는 것이고, 서서히 타인의 생각 흐름 속에서 자생적으로 가지를 치기 시작하는 나의 생각을 발견하게 된다. 생각의 발판 위에서 새로운 생각이 싹트기 시작하고 그런 생각들이 여러 갈래를 형성하면서 나눠지기도 하고 어느 지점에선 연관성을 갖는 생각들이 모여들기도 한다. 그렇게 헤어짐과 만남을 반복하면서 생각은 자신 만의 경로를 묵묵히 걸어나가게 되고 그런 생각의 흐름들은 또 다른 생각과의 만남과 헤어짐을 기약하게 된다. 트윗 리믹스를 한다. 트위터를 보면서 글을 읽는데 그치지 않고 글들을 새로운 리믹스의 밑 재료로 바라보는 나 자신을 바라보게 된다. 마치 힙합 아티스트가 다양한 사운드가 숨쉬고 있는 LP판을 차곡차곡 수집해 나가면서 자신 만의 사운드를 음악 창고 속에서 하나 둘 조합하듯 리믹스 놀이를 즐기게 된다. 아마도 트위터는 최고의 텍스트 리믹스 공간이 아닐까 싶다. 나는 트위터에서 하는 트윗합 놀이가 좋다. ^^ PS. 관련 포스트 튓합, 알고리즘 튓잼, 알고리즘 Trackback Address :: http://read-lead.com/blog/trackback/16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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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리퀄 :: 2014/04/09 00:09
트위터,페이스북엔 수시로 분절된 피드들이 타임라인 형태로 흘러간다.
그런 피드들이 축적되고 구조화된 것이 블로그 포스트. 아무리 봐도 트위터,페이스북은 블로그의 프리퀄인 듯. 블로그 포스트는 책의 프리퀄이다. 페이스북, 트위터는 블로그의 프리퀄이다. 블로그는 책과 페북/트위터의 중간 지점에서 책과 트위터/페북을 이어주는 매개체적 입지를 갖고 있다. 블로깅을 한다는 것의 의미는 현재 10%도 이해되지 못하고 있는 듯 하다. 세상은 수많은 프리퀄들의 범람으로 점철되어 간다. 새로운 것들이 고작 프리퀄에 불과한 것이고, 미래는 프리퀄들로 새로운 듯이 채워져 간다는 것. 블로그가 올드한 것으로 보이는 지금, 블로그와 찰떡 궁합이었던 검색도 역시 올드하다. 하지만 검색 이외의 것들이 난무하는 지금, 검색은 올드하기만 한 건 아니다. 비검색의 영역이 넓어질 수록 검색은 새로운 의미를 향해 이동하게 된다. 디스커버리. 그건 우연한 발견이 아니다. 필연적 디스커버리. 검색이 앞으로 구현해야 할 과업이다. PS. 위 트윗에 대한 윤하님의 통찰력 있는 멘션 기억체계도 연상되네요. 책--<장기기억>--<작업기억(단기기억)>--트위터/페이스북, 프리퀄이란 말에서는 '그 아이는 아버지를 선언해야 했어. 이를테면 아이는 나무보다 더 나이가 많은 열매였던 셈이지'라던 융의 구문도 떠오르구요 :) 언뜻 이런 구조가 연상됩니다. (공간)--책--블로그--트위터/페이스북--(시간), 과학이 발달하면 물질이 인간과 닮게 되는 걸까요? :) Trackback Address :: http://read-lead.com/blog/trackback/16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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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트리밍 :: 2014/04/04 00:04
음악은 이미 스트림이 소비 방식의 대세가 되어 있다. 회원가입되어 있는 음악 사이트에 가서 원하는 음악을 수시로 스트리밍 청취한다. 시간의 흐름에 귀를 맡기고 음악을 소비하는 모습.
동영상도 마찬가지. 스트림 기반의 소비는 일상 속에 깊이 침투된 상태. 그리고 텍스트. 페이스북, 트위터는 타임라인이란 포맷 기반으로 정보를 소비하는 플랫폼을 작동시키고 있다. 잘게 파편화된 정보들이 시간의 흐름을 따라 등장하고 사라져간다. 시간의 흐름을 타고 가볍게 유통되기에 적당한 분절형 정보들은 페이스북,트위터의 등장으로 인해 나름의 빛을 발하게 되었다. 타임라인이란 포맷. 스트리밍 메커니즘이 잘 작동하는 상황에선 힘을 발휘한다. 하지만 스트리밍에 어울리지 않는 컨텐츠 구조에선 타임라인형/카드형 포맷이 잘 먹히긴 힘들다. 정보는 다양한 소비 메커니즘에 의해 분류되는 것이고 각자의 컨텍스트에 맞는 포맷을 만나야 최적화된 소비가 가능해진다. 페이지와 플레이 링크와 피드 에디팅과 스트리밍 미래의 정보는 플레이되는 페이지 피드되는 링크 에디팅되는 스트림 뭐 이런 식으로 forming 될 것 같다. 그리고 그런 진화의 과정 자체가 거대한 스트림의 형태로 vibrating 될 것 같다. ^^ PS. 관련 포스트 링크 vs. 피드 Contact Economy 나는 Container Economy를 살아가고 있다. Stream Economy가 도래하다. Trackback Address :: http://read-lead.com/blog/trackback/16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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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으로부터의 통찰 :: 2013/03/04 00:04@kimhs0927님의 멘션은 나에게 깊은 영감을 선물한다.
음악에서 비롯되는 통찰은 결국 세상을 포섭하게 되나 보다. ^^ ReadLead 글을 쓴다는 것은 뭔가를 표현하는것이다. 글에 표현된 것과 표현되지 않은 것으로 나뉘어진다는 것. 표현되지 않은 것은 일종의 아우라,허이다. 글을 쓸 때마다 허는 생성된다. 허는 배경일 수도 있고 뭔가를 생성하는 탄생소일 수도 있다. kimhs0927 음악 역시 쉼표(정적)에서 시작하죠.^^ ReadLead 과잉생산시대를 맞아 소비할 것은 널려있다. 그런데 뭘 소비해도 결핍감은 여전하다. 그건 나를 위해 생산된 것들이 희소하기 때문이다. 끊임없이 결핍감을 해소하기 위해 뭔가를 소비하려 하고 소비해도 채워지지 않는 결핍감은 또 다른 소비를 낳고. ^^ kimhs0927 내적 충만 없이 만족을 소비에서 찾을수록 머리와 몸은 점점 퇴화되는 듯. 결국엔 자극이 없으면 반응하지 못하는 고깃덩어리처럼요. ReadLead 나 자신을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능력. 나를 타인 바라보듯 나 자신으로부터 거리를 형성할 수 있는 힘.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분리. 나와 나 사이의 거리에서 발생하는 통찰만큼 나를 기쁘게 하는 것은 없다. ^^ kimhs0927 내가 나를 분리해서 흐르는 대로 맡겨놓고 나를 관찰해 보는 것. 가장 짜릿하고 멋진 모험이죠^^
ReadLead 공장생산 뮤직이 득세하는 상황에서, 뮤직 소비자의 질문은 "나는 어떤 음악을 원하는가?"가 아니라 "내 귀에 들려오는 주입형 음악은 무엇인가?"이다. 소비자의 취향 자체가 기획되고 있는 상황. 이런 상황 자체가 예능이 아닐까 싶다. kimhs0927 점점 자극 없이는 반응하지 않는 고깃덩어리가 되가는 듯한.기획에 묻힌 감성이죠. Trackback Address :: http://read-lead.com/blog/trackback/15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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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 응시 :: 2013/02/01 00:01
나는 무엇을 응시하는가? 내 시간의 대부분은 무엇을 응시하는데 사용되고 있을까? 돈? 명예? 권력? 우월? 안전? 감정? 그런 것들에 소비되는 시간은 과연 가치 있는가?
돈을 응시하고 그것을 동경하면 어떤 모습이 벌어지는가? 돈을 follow하면 매일 돈에 관한 근심,걱정,불안이 나의 마음 속으로 feed된다. 트위터,페이스북 앱을 실행하고 끊임없이 타임라인에 출몰하는 정보들을 기계적인 손놀림으로 스캐닝하는 로봇스런 사용자 행동과 별반 다를 것 없는 상황이 연출될 것이다. 마음은 온통 돈에 관한 피드로 범람할 것이고 그 피드들을 제대로 소화하지도 못한 채 시간은 하염없이 흘러갈 것이다. 명예도 권력도 우월도 안전도 다 마찬가지이다. 뭔가를 바라게 되면 그것에 관한 불안이 자생적으로 성장하게 되면서 끊임없이 마음 속 타임라인을 장악하게 된다. 단지 하나의 단어일 뿐인데 그 단어가 자행하는 타임라인 난자의 수준은 정말 무자비할 지경이다. 어떤 대상을 응시하는 것은 인간으로 살아가는 한 결코 회피하기 어려운 본능에 가까운 몸짓이다. 응시하라고 디자인된 몸을 갖고 태어나서 어떻게 응시하지 않고 살아갈 수 있겠는가?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마음 속 타임라인을 온통 그런 쓰레기 같은 피드 정보들로 가득 채우고 살아가는 건 생을 영위하는 자로서 매우 자존심 상할 수 있는 일이다. ^^ 마음이란 이름의 타임라인. 마음 자체를 응시해 보자. 내 마음 속에 지금 무엇이 피드되고 있는지 살펴보자. 지금 이 순간 내 마음 속에 무심코 피드된 정보가 나의 어떤 follow 행위에서 비롯된 것인지 근원을 추적해 보자.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내가 follow한 것에 관한 정보가 내 마음 속에 들어오는 것이지 내가 follow하지 않은 테마는 결코 내 안에 피드를 형성할 수가 없다. 내 마음 속 타임라인은 철저히 내가 선택한 것들로 가득 채워지는 것인데 그 모습을 응시하지 않고 그저 피드된 정보들에 의해 내가 속절없이 좌지우지되는 것은 매우 허무한 일이다. 가끔은 내 마음 속에 무차별적으로 들어오는 피드들 중에 영 아닌 것은 unfollow를 시도할 필요가 있다. 물론 그게 쉽지는 않겠지만 말이다. follow만 하고 unfollow를 하지 않으면 타임라인은 오염에 오염을 거듭할 수 밖에 없다. 오염을 막기 위해서는 타임라인을 stock이 아닌 flow의 상태로 유지해야 한다. 타임라인 플로우의 신선도를 유지하기 위해 내가 팔로우한 테마들을 쭉 점검해 보자. 그 중에 나를 유독 무기력하게 만드는 테마가 있다면 그로 인해 내 마음은 무척 혼란스런 상태에 놓여 있을 것이다. 내 마음을 응시하고 내 마음을 힘들게 만드는 테마를 찾아내는 노력. 너무나 vulnerable한 마음 타임라인에 한 줄기 희망을 제시하는 몸짓이 될 것이고 그로 인해 바뀌어 가는 나의 모습은 마음 피폐화 시대를 거스르는 리버스엔트로피적인 변혁의 단초가 될 것이다. 하루에 단 5분이라도 나의 마음을 응시하는 것. 길을 잃고 헤매는 현대인들에겐 너무나 소중한 시간일 수 밖에 없다. 세상은 정확히 두 종류의 사람으로 양분된다. 마음을 응시하는 자와 마음을 응시하지 않는 자로 말이다. ^^ PS. 관련 포스트 '타임라인'이란 이름의 감옥 내가 나를 뒤에서 지켜보는 느낌 맘봇 마음 건축 Trackback Address :: http://read-lead.com/blog/trackback/14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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봇 :: 2012/09/21 00:01
트위터를 보다 보면 재미있는 계정이 눈에 띈다.
들뢰즈봇, 칸트봇, 에리히프롬 봇, 지젝봇, 라깡봇, 노자봇, 쇼펜하우어봇, 칼융봇,, 수많은 철학자 봇이 무수한 철학자들의 커멘트를 충실히 트윗 타임라인에 등장시킨다. 봇의 글을 무심코 보고 있으며 묘한 기분이 든다. 1분 이상 읽기 어려운 철학자들의 난해한 문장들. 하지만 철학 봇의 글은 타임라인에 뜬 글을 살짝 읽어보면 되니까 부담이 없다. 철학 봇은 대중과 철학과의 거리를 좁혀주는 철학 대중화의 선봉장인가? ^^ 그런데.. 철학 봇을 10년 정도 운영하면 어떻게 될까? 특정 철학자의 글을 꾸준히 읽고 음미하고 트윗에 올리다 보면 철학자의 마음 속으로 들어갈 수 있지 않을까? 글을 구성하는 개념들이 익숙해지고 그 개념들로 구성되는 세계관이 구체적인 형상으로 다가오면서 텍스트 속에 숨어 있는 의미들이 드러나면서 자연스럽게 텍스트의 의도와 본질에 접속하게 되지 않을까? 특정 철학자의 세계 속에 온전히 들어가게 되면 그 철학자와 봇 운영자 간의 경계가 모호해지면서 어느덧 봇 운영자는 그 철학자가 되어 있지 않을까? 봇을 하면서 봇 대상의 패턴을 읽고 이해하고 예측할 수 있다면 결국 봇은 봇 대상이 되어간다. 나도 사람이든 사물이든 하나의 대상을 선정해서 봇이 되는 놀이를 해볼까나? 사물의 마음 속, 타인의 마음 속에 들어가서 그 사물의, 그 사람의 패턴을 읽고 예측하는 봇 놀이. 인간은 패턴의 집합체이다. 무의식적으로 패턴을 갖고 논다. 그걸 의식의 수면 위로 끌어올려 제대로 놀아볼 수 있다면 인간 본질 속을 유영하는 우아함을 만끽할 수 있지 않을까? ^^ PS. 관련 포스트 패턴, 알고리즘 패턴과 아바타 로봇, 알고리즘 Trackback Address :: http://read-lead.com/blog/trackback/14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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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길이가 줄었어요 :: 2012/09/17 00:07
트위터류의 서비스를 많이 사용하게 되면서 긴 글을 쓰기가 어려워졌다는 얘기를 많이 듣게 된다. 단지 긴 글을 쓰기 어려워진 게 아니라 짧은 글을 주로 적다 보니 생각 조차 짧아졌다는 얘기도 종종 듣는다. 이런 얘길 듣다 보면 미디어가 인간의 생각 기제에 깊은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이구나란 느낌을 은연 중에 받게 되기도 한다.
그런데.. 정말 그런 것일까? 트위터가 흥하면서 토막글 쓰기가 유행한 것은 사실이지만 토막글의 붐업이 깊이 있는 생각을 저해하고 있는 것일까? 난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 생각은 표현으로만 구성되지 않기 때문이다. 생각을 표현하려고 애쓰지만 결코 생각을 글로 다 옮길 수는 없다. 짧은 글이든 긴 글이든 생각의 일부를 옮긴 것이고 나머지 절반은 생각의 수면 아래로 잠복하기 마련이다. 긴 글을 썼다고 생각이 깊고 짧은 글을 썼다고 생각이 짧은 것은 결코 아니다. 오히려 툭 던진 짧은 글 하나가 훨씬 더 깊은 생각 빙산의 일각일 수 있다. 눈에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니라 눈에 보이는 것과 눈에 보이지 않는 것 간의 관계가 중요하다. '나의 글이 짧아졌음'의 의미를 잘 생각해 봐야 한다. 글이 짧아졌다는 것은 글의 흐름 보다는 글의 포인트에 집중한다는 얘기다. 흐름과 포인트는 각자 나름의 가치를 가지고 있는 것이지 깊이나 퀄리티 측면에서 둘 사이의 우열을 가리기는 어렵다. 각자 자신에게 편리한 도구를 사용한다는 관점에서 긴 글과 짧은 글을 바라보면 된다. 두 가지 도구 중 하나만 사용해도 좋고 둘 다 사용해도 좋다. 컨테이너는 분명 중요한 장치이다. 하지만 컨테이너가 모든 것을 다 해줄 것이란 믿음은 불필요하다. 컨테이너에 의존하려는 생각이 컨텐츠 부실을 낳는 것이지 컨테이너를 이용하려는 의도를 잃어버리지 않는 한 컨테이너는 조력자의 위치에서 벗어나기가 어렵다. 컨테이너를 지배자로 만드는 것은 컨테이너를 바라보는 자의 수동적 태도인 것이다. 눈에 보이는 것에 경도되지 말아야 한다. 내가 쓴 글이 짧은 글이든 긴 글이든 상관없이 내가 적은 글이 온전히 표현하지 못하고 있는 나의 생각이 무엇인지에 몰입할 필요가 있다. 짧은 글 한 줄과 그 한 줄의 기저에 깔려 있는 내 생각의 빙산이 진동하고 있음을 들어야 한다. 글은 시각 매체일 뿐 아니라 청각 매체이기도 하다. 씌어진 글을 읽고 씌어진 글의 이면에서 일어나는 잠재된 생각의 진동을 들어야 한다. 그걸 듣는 훈련을 거듭하면 할수록 짧은 글이 짧은 생각이 아님을 이해하게 된다. "글 길이가 줄었어요."란 말 속에 길이 이상의 의미를 담지 말아야 한다. 우리의 생각은 예전이나 지금이나 우주와도 같은 광활한 넓이와 진폭으로 숨쉬고 있는 것이고 우린 그것을 어제보다 오늘, 오늘보다 내일 더 많이 이해하게 될 것이다. 내가 적은 짧은 글 하나. 우습게 보이는 그 토막 글이 사실은 거대한 우주인 것이다. ^^ PS. 관련 포스트 쇠락 속 가치 발현, 블로그 한확, 알고리즘 제약과 자유 Trackback Address :: http://read-lead.com/blog/trackback/14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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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산과 소비 :: 2012/06/20 00:00소셜 네트워크는 생산물을 나누고 거기서 부차적인 생산/소비가 동시다발적으로 발생한다. 이제 생산은 소비의 대상이 되어가고 있다.
소비는 더 이상 생산물의 일방적 수용에 그치지 않는다. 생산물에 끊임없이 피드백을 가하고 그 피드백은 새로운 생산물로 소비자에게 다가온다. 소비한다는 것은 결국 뭔가를 생산하고 있다는 의미이다. 소비를 통해 의도를 표현하고 소비를 통해 정체성을 드러낸다. 이제 소비는 생산의 대상이 되어가고 있다.
생산과 소비는 원래 하나였다. 그저 편의상 지금까지 서로 상반된 의미로 나눠져서 사용되었을 뿐이다. 생산과 소비가 형성하는 뫼비우스 열차에 우리는 이미 탑승하고 있다. 그 열차가 우리를 어디로 데려갈 지는 우리가 얼마나 탑승 스킬을 발휘할 지에 달려 있다. PS. 관련 포스트 프로슈밍 플랫폼 = 트위터/페이스북 소비자는 무엇을 원하는가? 독저, 알고리즘 Trackback Address :: http://read-lead.com/blog/trackback/13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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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의 탑을 정주행하다 :: 2012/05/02 00:02
개인적으로 만화를 거의 보지 않는다.
2000년 이후에 만화를 본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랬던 나인데. 최근에 우연히 '신의 탑'이란 웹툰을 알게 되었다. 호기심이 생겼다. 예전 같으면 호기심이 생겼다는 이유 만으론 만화를 보기가 쉽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스마트폰이 존재하기 때문에 별도의 시간을 내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만화를 볼 수 있는 시공간이 허락된다. 전철을 타고 다니면서 만화를 봤다. 화장실에서 볼 일을 보면서 만화를 봤다. 내 일상에 전혀 부하를 주지 않으면서 만화를 봤다. 결국 정주행을 시작한지 일주일 만에 다 봐버렸다. 그리곤 생각했다. 1~2년 후에 정주행을 시작해도 좋았을 걸. 신의 탑을 정주행하는 만화 주인공의 행보. 전철,화장실,짜투리시공간에서 스마트폰으로 뭔가를 정주행하는 나의 행보. 뭔가를 처음부터 끝까지 쭈욱 정주행한다는 것. 스마트폰의 등장으로 트위터/페이스북 타임라인에 올라오는 스트리밍형 컨텐츠를 짧게 짧게 소비하는 행태에 젖어 있다 보니 정주행이란 단어는 그동안 내게 너무나 어색한 개념이었던 것 같다. 하지만, 금번 신의 탑 정주행을 통해 컨텐츠 아카이빙의 창고를 처음부터 쭉 훑어 나가는 재미를 새삼 느끼게 되었다. 트위터/페이스북 타임라인의 짧은 글들을 소비하다 보니 정주행 방식의 컨텐츠 소비의 맛이 더욱 깊게 느껴진다고나 할까. 신의 탑으로 인해 스마트폰으로 뭔가를 정주행한다는 것이 가능하다는 것을 인지하게 되었다. 사실 e-book도 대표적인 정주행 대상이긴 하지만, 책을 원체 잘 읽지 않다 보니 이북을 가까이할 기회는 그닥 많지가 않았는데 신의 탑을 통해 '정주행'이란 단어를 제대로 의식하게 된 셈이다. 분절화된 컨텐츠의 속절없는 생성과 휘발로 범람하는 타임라인 속을 살아가면서, 느긋하고 차분하게 뭔가를 정주행할 수 있다는 것은 매우 희소가치가 있는 행위이다. 타임라인 속에서 조각조각 흩어지기 쉬운 사고 패턴도 정주행스럽게 가다듬어야 하겠구나란 반성도 같이 해보게 된다. 신의 탑을 정주행하는 주인공의 모습을 보면서 나도 신의 탑을 정주행하게 되었고 앞으로 정주행 모드를 내 일상 속에 더 많이 확산시킬 수 있겠다는 희망을 얻게 되어 나름 기쁘다. 최근 2~3년 동안 수동적으로 피드 기반의 타임라인을 소비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권태를 느끼게 된다. 이젠 나만의 타임라인을 좀더 능동적으로 구성해 나가야겠다. 최신 업데이트 기반의 타임라인이 아닌 시간의 흐름을 내가 직접 정의하고 내가 구성한 시간의 흐름 속에서 나만의 순서로 정보를 소비하고 나만의 플로우로 생각을 전개해 나가는 것. 신의 탑에서 배운 행동지침이다. 타임라인이란 이름의 감옥. 타임라인이란 이름의 자유. 감옥과 자유는 타임라인을 대하는 태도에 의해 결정되기 마련이다. ^^ PS. 관련 포스트 '타임라인'이란 이름의 감옥 Trackback Address :: http://read-lead.com/blog/trackback/13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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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약과 자유 :: 2012/04/09 00:09제약을 관찰하면 할수록 제약은 자유의 뒷면임이 분명해진다. Trackback Address :: http://read-lead.com/blog/trackback/13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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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unha_lee님의 트윗 멘션 :: 2012/02/17 00:07
@yunha_lee님의 트윗 멘션에서 항상 많이 배운다.
트윗의 휘발성이 너무 아쉬워서 이렇게 별도 포스팅을 해본다. ^^ @ReadLead 기억은 저장이라기 보다는 동적 편집에 가까운 개념이다 . 그래서 기억은 암기와는 다른 DNA를 갖고 있는 것이고 오히려 망각과 밀접한 포지셔닝을 취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yunha_lee 암기는 분절적이지만, 기억은 스토리텔링 혹은 내러티브가 들어가는 게 아닐까 싶어요. 시간이 섞이고 주체의 역사를 만드는 재료로 쓰이죠. 휘거나 변용되지 않는, 은유적이지 못한 딱딱한 암기는... 길을 잃는 능력이 없네요. 로봇처럼. @ReadLead 우리는 무의식적으로 시간에 태깅을 한다. 흘러가는 시간에 아무런 태깅 없이 무의미를 더하는 것 같지만 사실 그렇지 않다. 시간도 흐르고 나도 흐른다. 흐름 자체가 시공간 상에 대한 태깅이다. 나는 호흡을 하듯 태깅을 하며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yunha_lee 맞아요. 무작위적, 분산적, 이토록 상대적인 세상을 태깅하면서 결정적, 수렴적, 절대적인 자취들을 축적해가는 듯해요 :)
@ReadLead 진공은 무엇일까? 정말 아무 것도 없는 텅빈 공간일까? 아마 아닐 것이다. 진공은 우리 인지체계로 파악이 되지 않을 뿐 분명 뭔가를 함유하고 있고 끊임없이 뭔가를 하고 있다. 만물의 기본은 원자도 아니고 소립자도 아니다. 만물의 기본은 진공이다. @yunha_lee 가능성이 아직 원자도 현상도 되지 않은, 슈뢰딩거의 1/2 고양이의 공간, 빛이 탄생하지 않은, 아원자의 세계. 무한하고 영원한, 없지만 있는 세계. 경계이전의 공간. @ReadLead 리처드 도킨스의 '무지개를 풀며 (Unweaving the rainbow)'를 읽지 않고 책 제목을 보며 드는 생각. 비밀 코드를 해독할 때, 세상의 이치를 밝혀내기만 하는 건 아니다. 밝혀낸 만큼 비밀 코드 속으로 숨는 뭔가가 반드시 있기 마련이다. @yunha_lee 빛이 있으면 꼭 그림자가 있죠. 빛 이전의 무엇이 바로 그 '진공'의 세계겠죠? 아이슈타인이 빛보다 빨리 뛰어 빛 앞에 서면 무엇이 보일까 궁금해했다는데, 리드리드님도 비슷한 생각 중이시군요 ^^ Trackback Address :: http://read-lead.com/blog/trackback/13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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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깅과 자취 :: 2011/12/28 00:08만물은 태깅한다. 비밀코드 해독과 진공 컨텐츠 바리스타 진화와 죽음, 일각과 빙산 Trackback Address :: http://read-lead.com/blog/trackback/12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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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이즈 필터링의 주체 :: 2011/11/18 00:08
정보가 팽창하고 범람하면 할수록 정보를 필터링하는 에이전트들이 발전하게 된다. 아마존의 상품추천 알고리즘은 대표적인 노이즈 필터링의 예이다. 아마존은 유저가 좋아할만한 상품만 골라서 추천을 해준다. 유저가 관심을 갖지 않을만한 상품은 추천상품군에서 사전 필터아웃(차단)시키기 때문에 유저는 입맛에 맞는 상품추천 정보만을 보게 된다.
페이스북,트위터의 타임라인은 유저가 피드받을 대상을 선택하면 특정 대상으로부터 피드되는 정보만으로 타임라인이 구성되고 유저는 자신에게 피드되는 타임라인 정보만을 소비하게 된다. 아마존이 유저의 방문/구매 패턴을 분석하여 임의로 상품을 추천한다면, 페이스북/트위터는 유저가 명시적으로 선택한 정보 풀에서 정보가 피드되게 하는 방식을 가져가고 있는 셈이다. 암묵적이냐 명시적이냐의 차이는 있지만 모두 노이즈를 사전에 차단하고 연관성 높은 정보를 filter-in 시키는 방식을 취하고 있다. 노이즈를 필터링한다는 것. 사람은 세상을 그대로 직시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향해 돌진하는 정보의 일부를 취사선택하는 시스템을 은연 중에 운영하고 있다. 사람은 생물학적으로 자신을 향한 모든 정보를 다 수용하지 못한다. 볼 수 있는 영역에 제한이 있고 들을 수 있는 영역에 제한이 있다. 모든 정보를 다 수용한다면 인간은 아마 정보 쓰나미를 견디지 못하고 쓰러지게 될 것이다. 의미 있는 정보만 선택적으로 수용하는 필터링 시스템은 인간이 살아가기 위한 기본 조건이다. 온라인 상에 범람하는 정보의 물결에 어떻게 대처해야 할까? 최초에 선정한 필터링 조건(페이스북/트위터)에 의해 기계적으로 피드되어 들어오는 정보를 수용하고, 아마존이 정교한 상품추천 엔진을 통해 추천하는 상품정보를 수용하는 모습은 온라인 정보의 효율적 수용에 필터링 에이전트가 얼마나 강력한 영향력을 발휘하는 가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온라인 상의 노이즈 필터링 에이전트는 효율 관점에서는 매우 유용한 툴임에 분명하다. 하지만 효율을 지나치게 강조하다 보면 창의력을 제고하고 혁신의 기회를 포착하는데 있어서 명확한 한계점에 부딪히기 쉽다. 혁신은 수많은 노이즈 중에서 의미 있는 노이즈를 발굴하는 과정인데 노이즈를 사전에 차단하게 되면 혁신의 기회도 사전에 차단되어 버린다. 일방적으로 필터링된 정보를 수동적으로 받아먹기만 하는 것의 폐해를 알아차려야 한다. 노이즈 필터링 에이전트는 노이즈만 거르는 것이 아니라 혁신의 기회도 함께 거른다는 것을 명확히 인지해야 한다. 나를 도와주는 아마존의 상품추천 알고리즘, 내겐 한없이 편한 페이스북/트위터의 타임라인은 나의 편식 취향을 극대화시키는 편식 도우미일 수 있다. 노이즈를 필터링 에이전트에게 일임하지 말고 나를 향해 다가오는 정보 중에서 일견 노이즈로 보이지만 나의 생각을 혁신시키고 나의 행동을 바꿔줄 뭔가를 적극 수용할 수 있는 기회의 시간을 확보해야 한다. 의미 있는 노이즈를 내 옆에 가까이 둘 수 있으려면 스스로 필터링 에이전트가 되어야 한다. 즉, raw information에 스스로 접근해서 의미 있는 노이즈 정보를 픽업하는 노이즈 발굴자가 될 필요가 있다. 요즘 유행하는 슈퍼스타 K, 위대한 탄생의 심사위원/멘토와 같은 마음으로 원석을 발굴하는 역할을 직접 수행해야 한다. 노이즈 필터링의 주체는 누구인가? 나는 필터링 에이전트에게 모든 것을 맡긴 채 필터링 에이전트가 입에 넣어주는 혀에 잘 받는 음식만 쏙쏙 받아먹는 수동적 정보소비자인가? 아니면 슈스케/위탄의 오디션 심사위원/멘토와 같이 지금은 노이즈에 가까워 보이지만 향후에 찬란한 빛을 발할 가능성을 갖고 있는 원석을 발굴하는 탐험가인가? ^^ PS. 관련 포스트 아마존이 내게 생뚱맞은 책을 추천해 주면 좋겠다. '타임라인'이란 이름의 감옥 소음, 알고리즘 Trackback Address :: http://read-lead.com/blog/trackback/12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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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임라인'이란 이름의 감옥 :: 2011/11/07 00:07페이스북, 트위터는 피드 기반의 정보 소비를 본격화시켰다. Feed는 나의 취향에 부합하는 정보 위주로만 소비하게 하는 명확한 이점을 갖고 있는 반면에 '나'라는 상자 속에 갇혀서 헤어나오지 못하게 만드는 정보 편식의 문제점도 분명히 내포하고 있다. 나의 관심사에 부합하는 정보를 편리한 방식으로 소비한다는 취지가 오히려 관심사에 부합하는 유사 정보로만 구성된 편협한 관점들로 스트리밍되는 타임라인 구성 상의 한계가 될 수 있는 것이다. 이는 일종의 Relevance의 역습으로도 볼 수 있을 것 같다. 피드 기반의 정보 소비를 하다 보면 점점 내 입맛에 맞는 정보만 입수하게 되기 쉽다. 훌륭한 정보 필터링 에이전트를 곁에 두고 정보 에이전트가 걸러서 가져다 주는 정보들만 소비하는 모습은 간신들에 둘러 쌓인 왕의 신세와 그닥 다를 바가 없는 것인지도. ^^ 정보 필터링 에이전트는 쓰나미와도 같은 정보 홍수 속에서 효율적인 정보 소비를 도와주는 편리한 툴인가? 아니면 나의 관점을 특정 영역으로만 한정시키고 틀을 깨는 사고의 기회를 사전에 차단하는 정보 편식 툴인가? 창의력은 서로 연관성이 없어 보이는 대상과 대상을 연결하는 능력이다. 창의력의 핵심은 연관성을 창조하는 힘이다. 연관성을 창조하려면 연관성이 없어 보이는 지점에 위치하고 있어야 한다. 다양한 생각을 접하고 내 생각과 반대되는 관점과의 긴장관계를 통해서 창의적 사고력을 길러나갈 수 있는 것인데, 피드 위주로만 정보를 소비하고 나의 취향과 맞지 않는 관점을 사전에 차단하면 편협한 사고의 틀 안에 갇힐 가능성이 높아지게 된다. 나의 정보소비 패턴을 면밀히 짚어볼 필요가 있다. '나'라는 상자 속에 갇히는 방식의 수렴형 정보소비를 하고 있는지, '나'와 다른 생각을 접하고 그것과의 대립/긴장 관계를 통해서 나의 생각을 변주/확장시켜 나가는 정보소비를 하고 있는지. 소셜네트워크 서비스는 접속과 단절이 결코 반대의 개념이 아니란 사실을 잘 보여준다. 온라인 상에서 관계를 맺고 있고 서로 연결되어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모두 자신만의 '타임라인' 안에 갇혀 사는 온라인 코쿤 생활을 하고 있는 것이다. 소셜네트워크 서비스가 '타임라인'에 갇혀 사는 코쿤들을 양산하는 모습은 인간 삶을 극명하게 투영하고 있다. 사람은 넓은 세상을 한껏 느끼며 살아가는 것 같지만 실상은 자신을 향해 입수되는 정보를 제멋대로 가공하고 있는 뇌 속에 갇혀 사는 존재다. 뇌/타임라인 속에 갇혀서 뇌와 타임라인이 필터링해 주는 가상의 모습을 실제 세상이라고 착각하면 안 된다. 타임라인이 일방적으로 제공하는 필터링 정보에 휘둘리지 않으려면 스스로 연관성을 창조하면서 세상의 진짜(?) 모습을 파악해 나갈 수 있어야 한다. 연관성이 없어 보이는 지점에 위치할 수 있으려면 내가 정보를 소비하면서 어떤 방식의 필터링을 하고 있는지, 내가 어떤 정보를 filter-out하고 있는지 명확히 파악해야 한다. 내가 배제시키고 있는 정보들 중에 나를 창의적으로 자극하고 나를 혁신시킬 수 있는 열쇠가 숨어 있기 때문이다. 사람은 누구나 창의력을 극적으로 발휘할 수 있는 잠재력을 갖고 있다. 단, 사전 필터링을 통해 그 기회를 차단하고 있을 뿐이다. 개인화 타임라인의 등장은 정보 소비의 편리성 극대화와 정보 편식의 문제점을 동시에 의미한다. 타임라인의 편리함에 안주하며 안 된다. 필터링과 사고의 확장 간에 밸런스를 유지할 수 있는 날카로운 정보 균형감각을 지속할 수 있어야 한다. ^^ Trackback Address :: http://read-lead.com/blog/trackback/12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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