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욕망'에 해당되는 글 20건

웨어러블 :: 2016/03/04 00:04

스마트폰 시장이 포화상태에 이르자,
이제 웨어러블 디바이스를 차세대 아이템으로 밀고자 하는 움직임이 한창이다.

근데 그건 사업자의 의도일 뿐이고..

하지만, 웨어러블 디바이스를 실제로 써보면
사용자 입장에서 그걸 왜 써야 하는지에 대한 이유가 잘 몸에 붙지 않는 느낌이다.

그냥 사업자 중심의 필요에 의해 생겨난 물건일 뿐
사용자의 손목에 과연 그것이 찰싹 부착될 수 있을지에 대해선 다소 회의적이다.

사업자의 욕구와 사용자의 니즈가 어긋나는 건 시장에서 흔히 일어나는 일인데
웨어러블 디바이스의 현 위치도 그러한 듯 하다.

웨어러블 디바이스를 시장에 내놓기 전에 킬러 앱 정의가 끝났어야 타당한 건데
웨어러블 디바이스가 시장에 대거 풀린 후에 이제 와서 킬러 앱이 필요하다고 얘기하는 건 좀. :)

공급자 마인드로 일관하는 한, 킬러 앱이 나오기는 어려워 보인다.

어떤 계기가 필요할 것 같은데..

웨어러블 디바이스에서 티핑이 일어나기 위한 선행 조건은 무엇일까
무엇이 그것을 촉발시킬까

만약 웨어러블 디바이스가 잘못 만들어진, 사용자에게 외면 받게 될 디바이스라면
향후 흐름을 주도할 녀석은 과연 무엇일까?  :)

인터넷 비즈니스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어떻게든 신규 BM을 만들어 내려고 노력하지만
결국 궁극의 BM은 전통적 프레임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은 그것이듯 (검색, 게임...)
차세대 디바이스를 향한 집착과 고뇌도 결국 허무한 결론으로 귀결될 듯 싶기도 하고. (그냥 스마트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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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기는 :: 2015/12/25 00:05

컨테이너에 컨텐츠를 담는다는 것

어떻게 보면 사용자가 주체가 되어 컨테이너에 컨텐츠를 담는 것처럼 보일 수 있겠으나

실은
사용자가 주체가 아닐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사용자의 욕망은 컨테이너와 컨텐츠에 의해 만들어진 것일수도..

결국
컨테이너의 담고 싶어하는 욕망과
컨텐츠의 담기고 싶어하는 욕망이
사용자에게 투영되면서 사용자는 컨테이너/컨텐츠의 욕망을 자신의 것으로 착각하는..

이제 나의 욕망이 뭔지에 대해 깊게 살펴봐야 할 듯 싶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완전 농락당할 가능성이 높아진 상황이라. ^^



PS. 관련 포스트
담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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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게 만드는 :: 2015/09/02 00:02

어떤 책에 대한 글을 읽다가
그 책을 사야겠다는 마음이 일어날 때가 있다.

결국 그 책을 사게 된다.

하지만,
내가 산 건 책이 아니라
책을 논하는 글이다.

난 책을 말하는 글을 구매한 것이다.

하지만 그 글을 구매할 방법을 알지 못해서
차선책을 택했을 뿐이다.

내 지갑과 직접 만날 수 있는 건 책이니 말이다.

내가 그 글을 마음에 들어 한다는 사실을 확인하기 위해 책을 샀다.

그리고 얼마 후 책이 나에게 배달된다.
그 책은 내게 낯설다.

이미 책을 얘기하는 글을 읽고 충분히 만족한 상황이라서
뒤늦은 타이밍에 나를 찾아오는 그 책은
구매라는 행위가 주는 뒷맛만 나에게 전달해 줄 뿐이다.

그래도
난 맘에 드는 글이 있을 때 그 글이 언급하는 뭔가를 살 것이다.

구매란 원래 그런 것이니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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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비재와 소비노 :: 2013/12/11 00:01

베끼려면 제대로 베껴라
이노우에 다쓰히코 지음, 김준균 옮김/시드페이퍼


책을 읽지 않고 쓰는 글이다. 책 목차만 봐도 메세지가 느껴지기 때문에. ^^

이 책의 목차는 아래와 같다.  맨 마지막 줄에 너무도 인상적인 문구가 보인다.  경영서를 소비재로 끝내지 않기 위하여. 사실 모든 경영서가 소비재 아니던가?  경영서의 일반적 한계를 넘어서고 싶다는 저자의 의지가 엿보임과 동시에 소비재란 단어가 그리 심상치 않은 느낌으로 다가오기도 한다.

머리말: 모방의 패러독스

제1장 모방은 은유다: 메타포와 이노베이션
제2장 모방해야 할 본질을 모델링하라: 인도 노점상의 경우
제3장 모방의 4개 요소와 5단계 스텝: 검은
고양이의 혁명
제4장 모방의 창조성: 2개의 카페
제5장 누구를 어떻게 모방할 것인가: 4개의 교사
제6장 지키고, 부수고, 떠나라: 수파리(守破離)
제7장 모방의 함정: 모방할 수 있을 것 같은데 할
수 없는 회사
제8장 모방의 반전: 역발상 모델링
제9장 베끼려면 제대로 베껴라: 모방하는 법 모방하기

후기: 경영서를 '소비재'로 끝내지 않기 위하여

소비 사회를 살아가는 인간은 과연 어떤 존재일까?  소비의 홍수 속에서 소비에 휩쓸리며 소비를 통해 자신의 존재를 확인하고 소비가 없으면 단 하루도 살기 어려운 소비 의존적 존재가 아닐까?

소비재의 정의는 아래와 같다.
- 소비재: 인간이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하여 일상생활에서 직접 소비하는 재화.

위 문구를 뒤집어 보면 이렇게 되지 않을까?
- 인간: 자본이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하여 특별히 축조한 소비 프레임 내에서 마구 유린하는 재화

소비재에 불과한 경영서가 되지 않기 위한 경영서의 몸부림보다 더 중요한 것이 인간의 저항 아닐까? 소비재와 거의 동급으로 분류되는 인간 존재의 현재 위상에서 벗어나기 위한 인간 본연의 몸짓이 필요한 시점이 지금일 것 같다. 

인간은 누구나 저마다의 스토리를 생성하며 살아간다. 책을 내든 책을 내지 않든 인간은 누구나 자신의 스토리를 담은 책을 출간하고 있다. 그리고 그 책 후기엔 아래와 같은 후기가 들어가야 한다. ^^

후기: 인간을 '소비노(소비의 노예)'로 끝내지 않기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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갖고 있는 것 vs. 갖고 싶은 것 :: 2013/09/13 00:03

사람에겐 갖고 있는 것과 갖고 싶은 것이 있다. 대개는 갖고 있는 것을 살짝 소홀히 여기고 갖고 싶은 것에 에너지를 쏟는 경향을 보인다. 갖고 있는 것은 잡은 물고기이고 갖고 싶은 것은 잡아야 하는 물고기라서 그런 건가. 어쨌든 갖고 있는 것보다 갖고 싶은 것에 한층 더 몰입하곤 한다.

하지만, 잡은 물고기는 정말 나의 물고기가 맞는 걸까?  나는 나이고 물고기는 물고기인데 내가 물고기를 잡았다고 나는 물고기를 완전 소유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일까?

물고기를 잡았다고 마음을 놓지 말자. 관심을 거두지 말자. 물고기를 잡았다는 것은 일회성 이벤트에 불과하다. 잡는 시점에 게임이 끝난 것이 아니라 잡은 후에 내가 어떻게 물고기를 바라볼 것인가에 따라 많은 것이 달라질 수 있다.

누구에게나 '현재'가 주어진다. 현재에 만족할 수 있는 방법을 많이 알고 있는 사람이 지혜로운 사람이다. 현재에 만족하지 않고 끊임없이 결핍감이 지향하는 것을 향해 질주만 일삼는 자는 허상의 안개 속을 살아가는 자이다. 물론 어느 정도의 결핍감은 건전한 모드로 작용할 수 있겠으나, 현재를 잡은 물고기로 간주하고 끊임없이 새로운 물고기를 잡기 위한 사냥을 반복하는 기계적 몸짓은 다람쥐 쳇바퀴 프레임에 철저히 갇혀 있음을 의미한다.

갖고 싶은 것보다 갖고 있는 것을 더 소중히 여기고 거기에 정성과 에너지를 쏟을 경우, 갖고 싶은 것을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여유가 생겨난다. 그건 삶을 대하는 내공이다. 갖고 싶은  것에 깃들어 있는 허상은 갖고 있는 것을 좋아할 때 서서히 그 균열의 틈을 보이기 시작한다.

소유는 1회성 이벤트가 아니다. '갖고 있는 것'을 소중히 할 수 있다는 것은 '소유'를 지속성이란 관점에서 바라본다는 것이고, 소유를 지속선 상에서 바라볼 때, 갖고 있는 것은 자동이 아닌 수동 메커니즘에 의해 끊임 없이 관심이 공급되어야 할 관리 대상이 된다. 갖고 있는 것에 관심을 주지 않게 되는 순간부터 나는 더 이상 그것을 갖고 있는 자가 아니라 그것으로부터 멀어지는 자가 된다. 그건 내가 더 이상 그것을 갖고 있지 않게 됨을 의미한다.

뭔가를 획득하고 그것에 대한 관심이 희박해지고 또 다른 뭔가를 획득하고 그것에 대한 관심이 희박해지고. 이런 과정이 반복되면, 어느 순간 나는 사실상 아무 것도 갖고 있지 않은 자가 되어 버린다. 결국 갖고 싶은 것이 많다는 것은 현재 갖고 있는 것을 소중히 여기고 있지 않다는 것이고 갖고 있는 것으로부터 끊임없이 멀어지고 있기 때문에 그 공허함을 견디지 못하고 계속 다른 뭔가를 갖고 싶어 안달이 나게 되는 것이다.

뭔가를 갖고 있다면, 그것을 매일 살펴보자. 그리고 그것을 끊임없이 가져보자.  뭔가를 갖는 것은 한 번에 끝나는 행위가 아니라 평생을 지속할 수 있는 행위이다. 만약 오랜 기간 가질 수 없는 것이라면 그건 갖고 있을 가치가 없는 대상이라 볼 수 있겠다. 결국 선별의 눈을 갖고 갖고 싶은 것을 잘 추리고 그것을 갖게 되면 그것을 향한 따뜻한 시선을 장기간 유지할 수 있어야 한다. 그게 올바른 가짐의 자세이다.

갖고 있는 것과 갖고 싶은 것의 갈림길에서 당당히 갖고 있는 것 쪽으로 지향점을 옮겨 놓는 것. 갖고 있는 것을 더욱 빛나게 하고 갖고 싶은 것을 냉정하게 바라볼 수 있는 시선은 그렇게 모락모락 피어난다.  일종의 '지속 소유'라고나 할까? ^^



PS. 관련 포스트
현재는 행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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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격 고로케를 보며 반성한다. :: 2013/07/08 00:08

충격 고로케에서 실시간으로 집계하는 낚시성 기사 키워드를 보고 있으면 마음이 착잡하다. 언론사와 수많은 뉴스 소비자들의 절묘한 궁합에 의해 탄생한 스타(?) 키워드의 위엄. 온라인에서 뉴스는 무엇이 되어가고 있는 걸까. 대중이 가장 원하는 것이 과연 이것일까.

충격  경악  결국  멘붕  발칵
부디 꼭 클릭해달라고 독자에게 간곡하게 부탁하거나
독자를 낚아보기 위해 언론사가 기사제목에 덧붙이는 일종의 `주문`

헉!  폭소  무슨일  이럴수가  알고보니  화들짝  이것  살아있네
이것이 무엇인지 제목에서는 이야기하지 않을 것이니, 궁금하면 클릭해보라며
독자에게 클릭을 간곡하게 부탁하는 일종의 `호객행위`

살아있네  몸매  미모  숨막히는  물오른  얼짱녀
언론사가 독자들에게 (주로) 여성의 몸매를 함께 관음하자고,
포르노 사이트가 전시하듯 대충 쓴 설명과 함께 제공하는 저퀄리티 포토 서비스



이런 현상이 횡행하는데 나의 클릭도 한 몫 했을 거라는 자책감에서 자유롭지 못할 것 같다.

화려한 낚시성 키워드로 구성된 태그 클라우드는 그 누구도 아닌 바로 나 자신의 모습이 아닐까.

충격 고로케는 나 자신의 모습을 비추는 냉엄한 거울인 듯 하다.

반성을 해야겠다.

충격의 주술, 경악의 주문에 현혹되지 않도록 손가락의 중심을 단단히 바로잡아야겠다.




PS. 관련 포스트
렌즈의 원칙, 고통의 원칙 - 인간 본성에 대한 통찰 (Winning With People)
비난과 자성 사이
거울 리더십
시장 거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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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력 :: 2012/11/30 00:00

지루한 듯 흘러가는 일상은 우주의 거대한 빈 공간과 닮아 있다.
무심한 듯, 도대체 뭘 하는가 싶은 무위감이 만연한 듯 하나
실은 그게 만물을 약동시키는 에너지 메이커.
무심한 듯 하나 실은 나를 끊임없이 움직이게 하는 그 무엇.

뭔가는 끊임없이 비어 있음을 견디지 못하고 수시로 허(虛)를 채우고 대체하는 왜곡화 작업을 반복한다.
뭔가는 허를 견디지 못하는 뭔가를 끊임 없이 압박하면서 허를 채우도록 조종한다.

허를 채우는 자와 허 채우기를 조종하는 자.
인간은 허를 채우는 자이고 인간 주위를 감싸는 허는 인간을 조종하는 자이다.

인간 안에서 허를 채우고 싶어하는 욕망이 발생하였든
인간 밖에서 허를 채우고 싶은 욕망이 주입되었든
마찬가지다.

인간 안에 허가 있고 인간 밖에 허가 있다.
허를 채우고 싶게 만드는 것은 결국 허이다.

인간은 허(虛)로 구성되어 있는데 그게 인간의 인지기관엔 잘 보이거나 들리지 않는다.
그래서 인간은 답답하다.
답답하니까 실체가 실체로 느껴지지 않고 실체보다 더 실체 같은 뭔가를 찾는 것이다.

실체보다 더 실체 같은 가상을 찾다 보면 결국 실체는 가상에 가리워지고
가상에 가리워진 실체는 미스테리가 되고 실체를 덮고 있는 가상은 일상이 된다.

허가 인간을 조종하는 것이 허의 원래 의도는 아닐 수 있다. 단지, 인간이 허와 관계를 맺는데 서툴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허가 인간을 조종하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는 것이다. 허를 있는 그대로 직관할 수 있으면 허와 잘 지낼 수 있는 것이고 허를 인정하지 못하고 외면하다 보면 허와의 관계는 왜곡되어 갈 수 밖에 없는 것이고.

허를 대체할 무엇을 찾는 것. 참 멀리 돌아가는 것이고 답을 얻을 수 없는 부질없는 짓이다.

허의 힘을 어떻게 대할 것인가?
허력을 서툴게 대하면 허에 의해 평생 조종당하는 로봇이 될 것이고 허력을 능숙하게 대하면 허와 함께 허가 펼쳐 나가는 세상 속의 나를 조금씩 조금씩 알아가게 될 것이다. 나를 알아가는 것이 세상살이의 핵심이라고 볼 때 허와 잘 지내는 방법을 터득하는 것은 세상살이의 핵심 노하우를 습득하는 것이다.

채우고 싶은 마음을 억누르자. 우주는 허로 구성되어 있다. 도대체 먼지에 불과한 인간이란 존재가 우주에서 무엇을 채울 수 있단 말인가? 차라리 마음을 비우고 비워진 마음으로 비워짐을 직관하자. 직관하다 보면 내가 어떻게 비워진 존재인지 이해해 나갈 것이고 비워진 나를 이해한 만큼 나는 비워진 세상 속을 비움으로 대할 수 있게 될 것이다.  허의 조종에 몸을 맡기지 말고 허력을 나의 힘으로 전환시켜 보자. ^^   



PS. 관련 포스트
원격, 알고리즘
강박과 B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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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toms sale

    Tracked from toms sale | 2013/06/13 10:47 | DEL

    Downloading stuff from this web site is as straightforward |as clicking the mouse rather than other web sites which move me here and there on the internet pagesRead & Lead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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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2/11/28 00:08

원자가 야구장이라면 원자핵은 야구공 정도의 크기에 불과하다. 원자의 속은 텅 비어 있다는 거다. 그럼 왜 우리는 원자들로 구성된 각종 사물을 텅 비어 있지 않다고 느끼는가?  우리는 미시 스케일이 아닌 거시 스케일 속을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만약 나의 몸과 마음이 온전히 미시 세계를 살아갈 수 있다면 나는 텅 빈 원자들로 구성된 다양한 사물들을 마음껏 투과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나의 마음은 절대 그렇게 느끼지 못하고 있고 나의 몸은 더욱 그렇다. 그래서 비어 있는 것을 비어 있는 것으로 못 느낀다.

뇌는 항상 가상을 만들어내고 그것을 좋아라 소비하며 살아간다. 뇌는 가상 현실 속을 살아간다. 뇌 입장에서 진실은 감당하기 어려운 정보라서 어쩔 수 없이 진실을 적당히 왜곡하여 소비하기 좋은 상태로 가상화한다.  

있는 것을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하고 가상의 영역을 설정하고 그 안에 안주하면서 있는 것을 왜곡해서 보는 인간 인지 능력의 한계는 한 편으론 거대한 기회를 내포한다. 있는 것을 있는 그대로 인지하기 위한 의식적 노력을 할 수 있다는 걸 인지하는 게 기회이다.

왜 뇌는 가상을 좋아할까?  뇌는 뭔가에 굶주려 있기 때문이다. 마치 야구장 안에 달랑 야구공 하나가 있는 모습처럼 뇌 속은 거대한 공허로 가득 차 있다. 뇌는 그 허함을 메우기 위해 수많은 가상을 필요로 한다. 실제로는 안에 아무 것도 없기 때문에 뭔가를 채워 넣지 않으면 '허(虛)'를 견디지 못한다. 비어 있으면 비어 있는 그대로 살면 될 것을.. 뇌는 왜 그렇게 비어 있음을 견디지 못할까? ^^

'허(虛)'를 채우려는 욕망에서 환상은 시작된다. 허를 그냥 두지 못하고 거기에 뭔가를 채우려고 하지만 허는 결코 채워지지 않는다. 결국 왜곡만 비대해져 갈 뿐이다.

우주는 허와 원소로 이루어져 있다. 허와 원소 사이의 공간을 왜곡으로 채우는 것은 원소의 욕망일까? 허의 관용일까? ^^ 허를 허로 인정하고 허를 섣불리 다른 무엇으로 대체하려 하지 않으면 겹겹이 나를 둘러 싼 환상의 거품을 걷어낼 수 있을 텐데. 가상의 굴레를 벗고 실체(?)를 향한 수줍은 발걸음을 내딛는 용기가 필요한 때가 지금이 아닐까? 

나를 구성하는 것이 허이고 내 주위의 모든 것을 구성하는 것도 허이고 나와 내 주위 사이에 존재하는 것도 허이다. 세상은 허로 구성되어 있다. 하지만 아무도 그것을 직시하지 못하고 그것을 대체하는 왜곡된 뭔가를 끊임없이 만들고 바라보며 살아간다. 이런 상황에서 허는 누가 챙기는가?  아무도 챙기지 않는 허를 이젠 슬슬 챙겨주기 시작해야 하지 않을까? ^^



PS. 관련 포스트
뇌 속여먹기
가상, 알고리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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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상과 욕망 :: 2012/09/26 00:06

초단절 시대 포스트에 uminsem님께서 아래와 같은 댓글을 주셨다.

기술이 발전할수록 파생실제가 실제를 대체하는 현상이 강화되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지도가 영토를 대체하고 통장에 찍히는 수치가 실제 돈을 대체하듯 인간관계도 소셜미디어라는 파생실제로 대체되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니, 언뜻 이런 생각도 해보게 되네요. 현실에서 맺는 관계는 파생실제가 아닌가? 오프라인에서도 학교와 같은 조직을 통해 에이전트가 요구하는 인간상을 길러내고, 우리가 맺는 인간관계나 학교에서의 추억이란 것도 어쩌면 게임의 룰 안에서 일어나는 에피소드는 아닐까? 그렇게 생각하고 보면 초연결은 온라인뿐 아니라 오프라인의 파생실제를 포함하는 개념으로, 초단절은 실존적 사유와 경험의 순간으로 나누어볼 수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추상은 특유의 증폭력을 갖고 있어서 물리적 한계를 갖고 있는 실재를 쓰나미와도 같이 뒤덮으며 증식해 나간다. 파생이 소스를 대체하는 현상. 소스보다 더 강력한 영향력을 갖고 사람의 뇌 속에 기생하는 파생 인자들. 실재가 개념적 추상으로 대체되고 추상이 지향점이 되어가고 지향의 대상으로서의 추상이 더욱 거대해져 가면 갈수록 인간 소외 현상은 심화된다. 인간의 욕망과 추상은 공생 관계를 유지해 나가며 서로를 증폭시키고 각자 거대화의 경로를 밟아 나간다. 추상의 거대화 프로세스 속에서 인간은 도대체 어디로 가고 있는 것일까? 추상의 거대화가 가속되면서 인간 소외의 양상도 더욱 고도화 되어가는 시간의 흐름 속에서 인간은 추상을 어떻게 직시해야 할까?

추상 자체만 놓고 보면 무리가 없다. 문제는 추상이 증폭된다는 것이다. 추상이 증폭되면서 소스를 덮치고 소스의 의미는 희미해지고 거대해진 추상만 홀연히 남아 추상 자체의 생존 게임이 전개되고 추상이 소스를 지배하는 구조 속에서 인간은 추상의 노예가 되어가는 현상이 일상화되는 모습. 추상의 증폭과 인간 욕망 간의 교접이 증폭의 도화선이었으므로 인간 소외에 대한 대응은 욕망과 추상의 연결점에서 시작되어야 한다.

나의 욕망은 어떤 추상 증폭 기제를 드리블하고 있는가?  내가 갖고 있는 욕망이 증폭시키고 있는 추상 기제의 거품은 무엇인가? 거기에 도사리고 있는 욕망의 빈틈은 무엇인가?  증폭된 추상을 현실적인 사이즈로 축소시키기 위해선 난 무엇을 선택하고 무엇을 수면 아래로 내려야 하는가?

금융에만 거품이 있는 것이 아니다. 이 시대를 살아가는 각 개인의 마음 속에 깃들어 있는 거품이 자본주의가 생성한 거품의 총합보다 결코 왜소하지 않다. 내 안의 거품, 내 안의 거품 생성 기제를 영화 감상하듯 플레이 시키고 나의 욕망 스토리라인 상의 어설픈 연결점을 찾아내는 영화 평론가의 입장을 견지해야 한다. 나의 몸과 마음 속에서 끊임없이 상영되는 초 스펙타클 SF 영화의 시나리오를 분석하고 시나리오에 지나치게 토핑된 추상의 거품을 드러내고 날 것의 향이 가득한 '나' 소스(source)를 음미해야 한다. 드레싱이 너무 강하면 진정한 미각을 잃어버리게 되니까. 

추상과 실재 간의 균형, 욕망과 나 사이의 균형을 이룰 수 있는 평형 감각을 간직하도록 하자. 실재를 압도하는 추상, 나를 소외시키는 욕망의 작동을 컨트롤하고 실재를 서포트하는 추상, 나를 건강하게 만드는 욕망을 양육해야 한다. 추상과 욕망을 그냥 냅두면 그들은 항상 제멋대로 안드로메다를 향해 고속 비행을 하는 경향이 있으니까.

지금 이 순간 나를 둘러싼 추상의 크기는?
나를 규정하는 욕망의 실체는?

추상과 욕망은 항상 관찰하고 규정해 줘야 한다. ^^




PS. 관련 포스트
역측정
초단절 시대
몸과 추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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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짜 원하는 것 :: 2012/04/20 00:00

혼자 사는 즐거움
사라 밴 브레스낙 지음, 신승미 옮김/토네이도


내가 원하고 바라고 꿈꾼다고 생각하는 것들의 대부분은 내가 아닌 남이 원하는 것이다.

정말 내가 원하는 것인지 아닌지 알아보려면,
그것에 대해 아무도 알아주지 않아도 내가 정말 그것을 원할 것인가란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져보면 된다.

원한다는 것, 바란다는 것, 꿈꾼다는 것.
그것의 뿌리를 따라가 보자.
그것이 얼마나 타인 의존적인 것인지 알게 될 것이다.

진짜 원하는 것이 무엇인가?
그걸 안다는 것은 혼자일 수 있는 힘을 갖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진짜 원하는 것이 무엇인가도 중요하지만
진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 수 있는 지 여부도 매우 중요하다. ^^




PS. 관련 포스트
혼자, 알고리즘
왜 원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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폰지의 귀환 :: 2012/03/12 00:02

부메랑
마이클 루이스 지음, 김정수 옮김/비즈니스북스



비즈니스북스의 이혜경님께서 보내주신 책이다.  

이 책을 읽고

현재 전세계적인 이슈가 되고 있는 금융위기는 마치 "폰지의 귀환"과도 같은 양상이란 느낌을 받았다
.

1925
년 미국 플로리다에 Charles Ponzi (찰스 폰지)란 사람이 살고 있었다찰스 폰지는 "90일만에 원금의 2배 수익을 보장한다"는 매력적인 투자 제안으로 8개월 만에 4만명으로부터 1500만불을 끌어 모은다하지만 찰스 폰지는 가치를 창출하는 어떤 사업도 벌이지 않았다. 단지, 투자 받은 돈의 일부를 떼어 먼저 투자한 사람들에게 수익금으로 제공했을 뿐이다수익발생을 믿는 투자자가 계속 늘어나는 한 찰스 폰지의 사기행각은 결코 드러나지 않는다이것이 폰지 게임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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찰스 폰지가 벌인 초대형 금융 사기극..  투자자들이 버블 메커니즘을 직시하지 못하고 버블이 주는 짜릿함에만 몰입하는 상황이 계속되는 한 다양한 형태로 반복될 것 같다. 상품에 메타를 먹이고 그 메타에 메타를 더하고.. 메타가 메타를 낳는 흐름 속에 원래 분명한 모습으로 존재하던 위험이 흐릿한 확률적 존재로 파동하고 사람들은 위험을 망각하게 된다. 금융산업에서 일어난 버블과 메타의 극적인 만남은 폰지게임과 확실히 차별화된 합법성,세련됨,울트라 복잡도를 무기로 결국 전 세계 경제를 뒤흔드는 초강력 알고리즘으로 자리잡고 말았다..

욕망은 자연스러운 인간 현상이다. 하지만, 관찰/통제되지 않고 무분별하게 증폭되는 욕망은 거대한 재앙의 부메랑이 되어 인간을 다시 찾아온다는 평범한 교훈.  폰지는 욕망이 있는 곳에는 어디든 찾아간다. 2012년을 살아가는 현대인들은 폰지 입장에선 너무도 좋은 먹잇감이란 생각이 든다. 

'부메랑'이란 책 제목.. 참 마음에 든다. ^^


P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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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블, 알고리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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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확실성, 불안, 그리고 BM :: 2011/12/23 00:03

우리는 불확실성이 커지고 있다는 말에 쉽게 동의하는 경향이 있다.  전 세계가 쓰나미, 블랙스완을 연상케 하는 극단적 상황에 대한 마음의 준비도 해야 한다는 식의 겁주기 메시지에 나름 순응적 태도를 보일 때가 많다. 그런데, 정말 그런 걸까? 세상은 불확실성 급증의 도가니 속으로 빨려 들어가고 있는 것일까? 

불확실성이 커지는 이유를 외부 환경의 격변으로 치부할 수도 있겠고, 불확실성이 커진다고 느끼고 표현하는 것이 알기 쉬울 수는 있겠으나, 실상은 불확실성이 급증한다기 보다는 불확실성을 급속하게 인식하게 되었다는 표현이 더 정확할 수 있겠다. 즉, 극적인 변화는 외부 환경의 불확실성의 수위 보다는 그것을 인식하는 인간의 마음 속 불안감의 수위에서 나타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불확실성은 예측용이성/통제용이성의 반대 의미를 가진다. 인간은 항상 뭔가를 더 예측하고 싶어하고 통제하고 싶어하는 마음이 커지는 쪽으로 시간을 보내왔다. 문명의 발전을 통해 인간의 외부 환경에 대한 예측력과 통제력은 비약적인 고도화를 거듭했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으나 그건 거대한 착각일 수 있다. 자고로 문명이 발전되는 동안 인간이 정말 질적 성장을 기록한 것인가라는 질문에 대해선 쉽게 대답이 잘 되지 않는다. 원시시대 대비 생명 위협이 현저히 낮아졌음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그닥 위험하지 않은 것에 대한 두려움을 양산하며 두려움의 총량을 유지하고 있다. 원시시대나 현대나 인간은 두려울 것이 있어야 안심한다. 인간 뇌는 두려움을 먹고 사는 기관이다. 인간 뇌는 마치 두려움이 유통되지 않으면 심심해서 미쳐버릴 수도 있다는 듯 끊임없이 두려움을 생성하고 소비한다. 문명 발전이 산출한 최대의 성과는 '원시시대의 원초적 두려움을 현대의 세련된 두려움으로 치환시킨 것'이 아닐까. 인간 뇌 속에 똑같은 두려움이 유통되면 인간 뇌가 지루해할까 봐 끊임없이 새로운 두려움을 인간 뇌 속에 주입시킨 것이 문명의 주요 과업이 아니었을까. ^^

예측용이성, 통제용이성을 높여간다는 착각 속에서 인간은 끊임없이 새로운 형태의 불안을 생산했고 그것을 적극적으로 소비했다. 그리고 그런 생산-소비의 순환 고리 속에서 불안 BM은 지속적인 성장을 거듭했다. 어느 시대나 인간 마음 속에 잠재한 불안을 자극하고 증폭된 불안에게서 돈을 뜯는 불안 BM이 존재했다.  


불확실성이 커진다는 것. 불안감이 커진다는 것. 두려움과 끝없는 숨바꼭질을 하고 싶어하는 인간 뇌를 자극하는 불안 BM의 존재. 불확실성, 불안감, 불안 BM은 매우 견고한 삼각편대 체제를 구성한다. 그 강력한 삼각 압박에 너무 많이 농락당하면 세상은 정말 불확실성의 소용돌이로 보일 것이다. 불안 BM을 직시하면 불안 BM에게 주입을 강요 받았던 내 마음 속 불안감은 실체성 여부를 검증 받게 것이다. 그리고 불확실성이란 단어에서 불필요한 강박은 필터링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이제 더 이상 불확실성이란 단어를 당연한 느낌으로 어리버리 수용해선 안 된다. 확실한 것 하나만 견지해도 불확실성이란 단어는 충분히 무력화시킬 수 있다. 확실한 것 하나는, 실체 없는 불확실성과 뜬금 없는 불안감을 똑바로 쳐다볼 수 있는 용기가 우리에게 있다는 것이다. ^^



PS. 관련 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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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화관리] 두려움 vs. 통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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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위욕구와 백야 :: 2011/10/17 00:07

밤이여, 나뉘어라
정미경 외 지음/문학사상사


정미경의 단편소설 '밤이여 나뉘어라'에 아래와 같은 말이 나온다.

밤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모르지? 백야가 계속되는 동안은, 덧창 없이는 잠들 수가 없어. 밤이 없으면, 잠들지 않고 일하면 썩 훌륭한 인간이 되어 있을 것 같은데, 그게 아니더라. 저 사람에겐, 자기 인생이 끝없는 하얀 밤처럼 느껴졌나 봐. 기억과 욕망이란, 신의 영역이란 걸 너무도 잘 알고 있기에 선택했겠지. 저 사람은, 그림자를 찾고 싶어 하는 거라고 생각해.


사람의 욕구는 무엇인가?
비즈니스는 소비자의 욕구를 이해하고 그것에 부합하는 상품과 서비스를 제공하고자 혼신의 힘을 다한다. 그런데, 그 욕구는 도대체 어디서 기인하는 것일까?  인간에 내재한 본성에서 우러나오는 것일까? 아니면 인간을 둘러싼 거대한 소비환경에서 비롯되는 것일까? 소비자의 욕구는 인간의 안과 밖에서 생성되는 것 같다. DNA와 환경의 공진화라고나 할까. 소비자의 욕구는 온전히 소비자의 것도, 온전히 사업자의 것도 아닌 공동 창작물인 것이다.

사람의 욕구는 디자인되고 있다.
비즈니스는 소비를 먹고 산다. 소비 없이는 지탱될 수 없는 것이 비즈니스이기에 비즈니스는 끊임없이 소비자의 욕구를 자극하고 또 자극한다. 순수한 욕구가 존재하기 어려운 이유다. 사람의 욕구는 비즈니스에 의해 철저히 분절화되어 비즈니스의 입맛에 맞게 재구성된다. 그건 일종의 가상 욕구이다. 소비자가 자신의 욕구라고 믿기 쉬운 욕구의 메뉴화.

허위 욕구가 범람하는 백야의 밤
비즈니스에 의해 재단되는 소비자 욕구는 더 이상 소비자를 숙면하게 하지 않는다. 소비자들은 가공된 불안과 욕구라는 상품을 자신의 것으로 받아 들인다. 희박해지는 자존감 속에서 소비자들은 자신의 것이라 믿는 허위 불안을 최소화하고 자신의 것처럼 느껴지는 허위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한 백야 행군을 지속한다. 분명 밤인데도 주위는 환하다. 환하니까 온전히 잠들 수가 없고 깨어서 뭔가를 걱정하고 뭔가를 충족시켜야 한다. 정미경의 단편소설 '밤이여 나뉘어라'에 나오는 천재 의사의 불면과 고뇌는 우리 모두의 일상일 수 있다.

허위욕구 직시와 불면 해소
내가 갖고 있는 허위 욕구의 실체를 파악해야 한다. 정말 그것이 나의 욕구인지, 아니면 내가 그 욕구에 의해 지배를 당할 때 이익을 향유하는 자가 만들어낸 가공의 욕구인지. 나의 욕구를 직시할 때 백야는 흑야로 복원된다. 비즈니스는 세상이 온통 백야로 환해지기를 바란다. 백야는 허상이다. 허상은 직시될 때 허상임이 분명해진다는 속성을 갖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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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비자는 무엇을 원하는가? :: 2011/04/04 00:04

소비자는 무엇을 원하는가?

소비자는 자신이 뭔가를 원한다는 착각을 끊임없이 지속할 수 있기를 원한다.

아무 것도 원하지 않는다는 사실 자체가 소비자 존재의 위기일테니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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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박과 BM :: 2011/02/11 00:01

자본의 의도가 몸에 깊숙이 개입된 지금, 몸에 대한 미학적(?) 관심은 점점 그 열기를 더해간다. 분명 우린 몸보다 몸매가 훨씬 더 중요한 시대를 살고 있다. ^^

알게 모르게 우린 정량화된 수치로 이상적 바디를 규정하고 그 바디라인에 들어가고 싶은 갈망과 들어가기 위한 노력을 지속하고 있다. 슬림하고 매력적인 바디를 가꾸고 싶어 하는 강박.

근데 슬림하고 매력적인 바디라인을 가꿔야 한다는 강박의 최대 수혜자는 몸매의 소유자라기 보단 그 강박을 통해 돈을 버는 슬림바디 관련 BM이라고 봐야 한다. 자본주의를 살아가는 인간의 꿈과 욕망 속엔 시장이 주입한 시장 이기주의적 논리들이 너무도 깊숙히 침투해 있다.

BM은 인간의 꿈과 욕망을 디자인하기 마련이다.  우리가 갖고 있는 꿈이 어디서 기인하는 것인지 잘 살펴봐야 한다. 아마 대부분은 우리 자신 속에서 자라나는 꿈이기 보단 비즈니스/시장의 니즈에 의해 인위적으로 정교하게 구성된 가상 꿈일 가능성이 높다.  그건 꿈이 아니라 또 하나의 강박인 것이다. BM은 봉(소비자)에게 강박을 주입하고 자본주의적 꿈을 주입한다. 그 꿈에 알게 모르게 주입된 자는 그 꿈이 자신의 꿈인 줄 착각하고 그것을 소중하게 가꿔 나가고 그것을 실현시킬 날만을 학수고대한다.


원격, 알고리즘 (2009.2.11)
유전자는 영속성을 추구한다. 유전자가 시간적 제약 때문에 인간의 몸 속에서 수동적인 존재로 기능하는 것처럼 보이나 사실 그 수동성이 커뮤니케이션의 대상인 인간으로 하여금 자신이 능동적으로 모든 의사결정을 내린다는 착각을 갖게 하는 것이지 사실 인간을 통제하는 원초적이고 기본적인 프로그램적 입력은 이미 뇌 속에 심어졌고 그것을 통제하는 강력한 사령관이 유전자일 수 있다.
유전자가 영속성을 강력하게 추구하듯, 비즈니스도 영속성을 강력하게 추구한다. 유전자가 인간을 리모콘 조종하듯 유린(?)하듯이, 비즈니스도 인간을 요리(?)한다. 

인간은 살아 가면서 자신이 대부분 주요한 의사결정을 내린다고 생각하지만 실은 유전자가, 실은 BM이 막후에서 인간의 의사결정을 유도하고 있기 마련이다. 그 현실을 직시하고 실질적인 주도권을 확보해 나가는 과정 속에 인생의 맛이 있지 않을까 싶다. 강박과 BM은 찰떡궁합이다. 내가 갖고 있는 강박 속에는 어떤 BM이 내재하고 있는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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뚱섹, 알고리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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