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보'에 해당되는 글 4건

악보 :: 2015/11/23 00:03

나의 삶이 음악이라면

내 삶의 악보를 구할 수 있을까?

악보를 구하면 난 그 악보를 읽을 수 있을까?

주어진 악보대로 연주하지 않고 나만의 즉흥연주를 한다면

내 삶은 어디로 흘러가게 될까?

악보에 적힌 흐름과 즉흥연주의 흐름 간의 갭은 나를 분열시키는 것일까?

분열된 나, 합일된 나. 나는 누구일까?

나의 삶이 음악이라면

난 연주자일까, 작곡가일까, 관객일까..

아니면 악기일까.

내 삶을 난 지금 듣고 있는 걸까.

난 들을 수 있는 걸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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벡사시옹 :: 2014/01/27 00:07

프랑스 작곡가 에릭 사티의 '벡사시옹(Vexations)은 좀 황당하다. 악보는 달랑 한 페이지인데, '이 악보를 840번 반복하시오'란 지시가 악보에 적혀 있다. 지시대로 악보를 연주하려고 하면 무려 13시간 이상이 걸린다고 한다.



13시간 이상이 걸린다니. 그런 음악을 듣고 있다고 상상만 해도 짜증이 난다. 난 음악에 대한 조예가 없어서 이 음악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잘 모르겠고, 별로 알고 싶지도 않다. 그냥 작곡가가 장난을 친 것 아닌가?란 개인적 의혹을 지울 길이 없다. ^^

그러나..
음악을 잘 모르는 나이지만, '벡사시옹'을 접하게 되면서 느끼는 바가 있긴 하다. 그냥 나의 관점에서 내 멋대로 적어보는 소감이라고나 할까..

'반복'은 사람을 짜증나게 하고 성가시게 하며 무기력하게 만든다. 뭔가를 무한에 가깝게 반복하는 것은 분명 정해진 틀 내에서 쳇바퀴를 도는 에너지 소모적 행위로 여겨진다. 그런데, '반복'이란 단어 자체에 함정이 있긴 하다. 같은 일을 되풀이 한다는 것. 우린 정말 그렇게 할 수 있을까? 같은 일을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되풀이 한다는 것. 그게 인간에게 정말 가능한 일일까? '반복'이란 단어 자체가 '버그' 아닐까? 불가능한 개념이 단어로 만들어져서 편의상 널리 유통되고, 그저 사용하기 편리한 단어라서 실상 그 단어가 허상에 가까운 것임에도 불구하고 계속 그 단어에 속고 또 속으면서 '반복'이란 존재하지 않는 개념을 짝퉁처럼 체화시키며 살아가는 것은 아닐까?  

어제와 같은 오늘, 오늘과 같은 내일. 그건 환상일 것이다. 어제와 같은 오늘이 아니라 어제와 같은 오늘일 거라고 착각하는, 어제와 그닥 달라지지 않은 오늘의 나일 것이라고 오해하는 어설픈 관성이 '반복'이란 환상을 낳고 스스로 만들어낸 '반복' 환상 속에 갇혀 지내면서 스스로 지루함을 생성하고 자신이 만들어낸 지루함의 굴레를 답답해 하며 '반복'이란 환상을 기어이 실체로 만들어 버리고야 마는 의도치 않은 집요함.

벡사시옹 악보에 적혀진 가이드대로 13시간을 넘게 연주하는 동안 연주자는 어떤 연주를 하게 될까? 그건 연주자의 태도에 달려 있는 것 아닐까? 마찬가지로 벡사시옹과도 같은 악보를 반복하듯 연주하는 모습이 인간의 살아가는 모습이 아닐까? 나에게 주어진 인생의 악보엔 벡사시옹보다 훨씬 더 잔혹한(?^^) 가이드가 적혀 있는 것이고 그 가이드를 어떤 자세로 수용하고 어떤 모습으로 연주할 것인지는 각 개인의 역량에 의해 퀄리티가 좌우되지 않을까?

벡사시옹 악보를 보면서 나에게 주어진 벡사시옹 악보를 마음 속에서 형상화시켜 본다. 난 나만의 벡사시옹 악보를 어떤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을까? 으이그. 이 지겨운 연주를 어떻게 해야 하나?란 멍한 눈빛일까? 아님 오늘은 이 악보를 어떤 색깔로 연주할까를 기대하는 초롱초롱한 눈빛일까?

난 지금 벡사시옹을 연주하고 있다. ^^



PS. 관련 포스트
무음, 알고리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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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가의 악보 :: 2013/10/28 00:08

피아노를 듣는 시간
알프레트 브렌델 지음, 홍은정 옮김/한즈미디어(한스미디어)

알파벳으로 글을 읽는 것과 단어로 글을 읽는 것. 그리고 문장으로 글을 읽는 것. 그리고 문단으로 글을 읽는 것. 그리고 그 이상의 덩어리로 글을 읽는 것.

결국 패턴의 문제다. 세상을 읽는 패턴의 크기, 넓이, 깊이가 세상을 읽는 힘을 좌우한다. 이 책을 통해 포괄적 패턴 보유의 중요성을 다시 한 번 인지하게 된다.

피아노를 논하는 대가의 책. 나열되는 단어들에서 힘이 느껴진다. 그리고 언급되는 키워드들이 일종의 생명력을 갖고 다른 키워드와 연결되고 서로 영향을 주고 받는 상호작용의 향내가 맡아진다.

아래 단어를 하나하나 짚어가면서 책을 읽는 느낌이 참 감미롭다. 대가의 따뜻한 시선이 단어에서 그대로 느껴진다. 따뜻한 화음, 따뜻한 단순함, 따뜻한 평형, 따뜻한 리듬..

A 화음, 악센트, 시작, 터치, 아르페지오, 녹음
B 바흐, 밸런스, 편곡, 베토벤, 브람스
C 칸타빌레, 캐릭터, 쇼팽, 크레셴도
D 디미누엔도, 지휘자, 돌체
E 단순함, 앙상블, 극단
F 환상곡, 운지법, 형식
G 감성
H 하모니, 하이든, 유머, 기침
I 해석자, 해석 1, 해석 2
J 비애의 피아노
K 음향, 피아노, 피아노 협주곡, 작은 음, 작곡가, 감시, 통제
L 레가토, 사랑, 독일가곡, 리스트
M 메트로놈, 모차르트
N 기보
O 옥타브, 오케스트라
P 페달, 프로그램, 맥박
Q 평형 그랜드 피아노
R 규칙, 레퍼토리, 리듬, 리타르단도, 감동
S 스카를라티, 종결, 슈베르트, 슈만, 스타카토, 고요, 싱커페이션
T 춤, 열정, 템포, 텍스트에의 충실성, 깊은, 트릴
U 연습, 이행, 해를 입지 않는
V 변주, 소프트 페달, 다양성, 비르투오시타, 악상기호
W 작품과 인물
X 짧은 풍자시
Y 윽!
Z 연관성


뭔가에 통달하면 뭔가의 주변을 자욱하게 형용하는 키워드들의 구름이 형성되는 것 같다. 그리고 그 구름의 형상을 따뜻한 시선으로 응시할 때 하나의 세계가, 하나의 우주가 약동하게 되나 보다.

그리고,
뭔가에 통달하면 많은 것들이 악기가 되어주는 것 같다. 우리가 알고 있는 피아노만 피아노가 아니다. 컴퓨터 자판이 피아노일 수 있는 것이고, 컴퓨터 마우스가 드럼일 수 있는 것이고, 핸드폰이 바이올린일 수 있는 것이다.

나는 지금 어떤 악기를 연주하고 있는가?  나의 악기에선 어떤 음악이 흘러나오고 있는가? 나의 악보엔 어떤 키워드들이 자욱하게 서려 있는가? 그 키워드들은 나를 어떻게 규정하고 나를 어디로 데려가고 있을까? 나는 결국 지금 이 순간 여기에서 어떤 존재로 진동하고 있는 것일까?

알프레트 브렌델의 '피아노를 듣는 시간'
책을 읽은 것 같다기 보단,
대가의 악보에서 우러나오는 향을 들은 것 같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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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채기와 악기 :: 2013/08/30 00:00

지인 중에 매우 독특한 재채기 소리를 내는 자가 있다.
에에~~취이~~ 에에~~ 취이~~

그 재채기 소리엔 그 사람의 성격과 스타일 등이 묘하게 포함되어 있다는 느낌이 든다. 자신의 퍼스낼러티, 세계관이(?^^) 담긴 듯한 재채기 소리를 들으면, 인간은 그 자체가 하나의 악기인 거구나란 생각이 든다. 자신만의 멜로디, 리듬, 에너지를 가진 악기라고나 할까.

나는 악기이다.
내가 숨을 쉬는 것은 일정한 리듬을 타고 공기와 소리의 흐름을 만들어내는 행위이고, 내가 말을 하는 것은 성대라는 기관을 활용하여 의도한 의미를 음성으로 전환시켜 표출하는 것이다. 내가 걷는 것은 신체의 다양한 기관들을 활용하여 일정한 보폭과 속도를 내면서 '걸음'이란 퍼포먼스를 수행하는 것이다.

나는 악기인 동시에 악기를 다루는 연주자이다.
나는 '나'라는 악기가 갖고 있는 물리적 한계 내에서 주어진 기능을 활용하며 연주한다. 또한, 악기가 갖는 물리적 한계를 넘어선 연주를 상상하기도 한다. '나'라는 악기가 갖고 있는 물리적 한계는 '나'라는 연주자의 상상을 자극하고, 나는 한계로 나를 연주하고 상상으로 나의 연주를 변주한다.  

삶은 한 편의 뮤지컬 퍼포먼스이다.
나는 악기로 작동하면서 연주자로 살아간다. '나' 악기는 살아 숨쉬는 기관이고, '나' 연주자는 상상하는 의도체이다. 나는 나의 안에 가둔 기능과 나의 밖에 감춰진 기능을 '나'라는 플랫폼 위에서 명시화하고 암호화한다.

에에~취이~~에에~~취이~~
단순한 재채기 소리를 듣고 나는 내 자신이  '악기 & 연주자'임을 깨달았다.

그렇게 보면 나의 블로그는 일종의 악보인 건가? ^^



PS. 관련 포스트
인간은 도구다. 하지만 도구만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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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BlogIcon The Black Ager | 2013/08/30 01:03 | PERMALINK | EDIT/DEL | REPLY

    저도 음악을 하는 사람 중 1인으로서 공감이 많이 가는 글인데요, 한계와 잠재력 간의 경계를 아슬아슬하게 오가는 일이 음악이라고 규정할 때 자아를 비유하는 개념 수단 중 '악기'만한 것이 없는 것 같습니다.

    나온 지 쫌 됐지만, 벅샷님께 소개할 생각을 못하고 있었네요. 제 미국 데뷔 싱글입니다. 들어주세요 ^^
    http://www.youtube.com/watch?v=A9-XMimTSrI

    • BlogIcon buckshot | 2013/08/30 21:58 | PERMALINK | EDIT/DEL

      악기이면서 연주자라는 포지션. 참 매력적인 것 같습니다.

      데뷔싱글. 넘 멋지십니다. ^^

  • 오리 | 2013/09/05 15:08 | PERMALINK | EDIT/DEL | REPLY

    읽고 보니 대학교 써클 때 피아노 잘치고 나름 이쁘장했던 여자애가 떠오르는군요. 정확히 에이치 발음으로 그것도 다소곳하게 재채기하던.... 근데 어렸을 때부터의 다년간의 훈련에 의한 것이 아니었는지 살짝 의심해 봅니다.ㅎㅎ 즐거운 오후 되세요~~

    • BlogIcon buckshot | 2013/09/05 20:56 | PERMALINK | EDIT/DEL

      아. 저도 가끔 그런 의심을 하게 하는 재채기를 들을 때가 있어요. 참 재미있어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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