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호'에 해당되는 글 6건

신호 :: 2018/09/21 00:01


UFC 경기를 보면
무리하게 공격 들어가지 않고
상대의 움직임과 거리를 앞손(레이더)으로 감지하면서
상대가 들어오는 타이밍에 카운터 펀치를 날리며 승리를 이끌어내는 패턴을 종종 보게 된다.

상대의 움직임을 통해
반격의 타이밍을 잡는 대응 방법론

신호를 탐지하려는 기본 자세
신호음이 울리는 걸 놓치지 않고 포착해 내는 센스와 스킬

비단 종합격투기에서만
카운터 펀치가 작동하는 것은 아니겠다.

앞손으로 계속 센싱을 하면서
뒷손을 내밀 타이밍을 찾는 흐름

UFC 경기를 보면서
격투기 영역 너머의 인사이트가 신호음을 내는 걸 감지한다. 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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맹자 :: 2015/12/07 00:07

짧고 굵은 고전 읽기
명로진 지음/비즈니스북스

맹자에 대한 소개가 흥미롭다.
혁명의 불씨를 지피는 위험한 책.

혁명.
일상을 살아가는 소시민 입장에선 결코 친근하게 느껴질 수 없는 단어.

하지만
내가 세상에 태어난 것 자체가 혁명적 변화 아닐까.
그것만큼 충격적인 현상이 어디 있을까.

그리고 태어난 것도 모자라
하루를 살아가고
내일 또 다시 깨어나고(살아나고)
그 다음 날 또 다시 살아가는
그런 흐름이 어떻게 당연한 것일 수 있을까.

일상이라 부르지만
그 일상을 조금이나마 이해하고 있는 걸까. 그렇지 않을 것 같다.
아무 것도 모른 채 그저 흘러가니까 그 흐름에 몸을 본의 아니게 맡기고 있을 뿐
일상엔 분명 혁명의 요소가 잠재되어 있다.

혁명은 모두에게 주어진 재료이다.
자신에게 인입되는 혁명의 신호를 인지하지 못하고 있을 뿐
일상은 그 자체로 혁명일 수 밖에 없다.
그냥 살아지는 게 아니라 의식적으로 삶에 감각을 곤두세우면 끊임없이 흘러가는 순간이 혁명일 수 밖에 없다는 생각을 하게 될 것이다. 나는 어제도 나였고 오늘도 나이고 내일도 나일 것이라고 안일하게 무의식적으로 여기고 있지만 실은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어제의 나, 오늘의 나, 내일의 나가 모두 다른 것이라면..  사실은 다른 것인데 그냥 근사적으로 같다고 착각하고 있는 것이라면.. 나에게 주어진 시간은 얼마나 놀라운 선물이겠는가.

고전 속에서 잠자고 있는 나의 문장
고전을 읽는 것은, 인간의, 인간을 둘러 싼 것들의 본질에 대한 느낌을 읽는 것.
본질에 근접하다 보면 인간 존재에 대해 깊게 생각할 수 밖에 없고
그런 과정 속에서 혁명이란 단어는 결코 어색하지 않은 일상적 재료에 불과하다는 것을..

고전읽기는 불씨 지피기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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찔화 vs. 찔성 :: 2013/07/03 00:03

누군가로부터 나의 생각/행동에 대한 피드백을 받고 화가 났다고 가정해 보자.  왜 화가 났는지 생각해 보지 않고 일단 화가 나니까 불편한 마음에 피드백에 대한 방어 기제가 작동하기 시작한다. 나의 생각/행동을 합리화하기 위한 여러 가지 변명(?)들을 늘어놓으면서 피드백에 대한 1차원적인 반응이 지속된다. 그렇게 반응하는 동안 또 다른 화가 나기 시작한다. 내가 지금 뭘 하는 걸까?에 대한 불편한 느낌이라고나 할까. 그런 식으로 피드백에 반응을 하는 과정 속에서 화가 증폭되고 화를 막으려 애쓰다 또 다른 화가 생겨나는 흐름이 어느 정도 마무리되고 나면 왠지 모를 아쉬움이 진한 안개처럼 나의 주변을 감싸게 되는데..

찔려서 그런 것이다. 나에 대한 피드백을 받고 화가 났다는 것은 그 피드백이 나의 생각/행동에 대한 정곡을 찔렀다는 것을 의미한다. 물론 완전 황당한 피드백을 받았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런 경우라면 화가 나지 않는 것이 일반적이다. 너무나 말도 안 되는 피드백을 받을 때는 그것을 아무런 부담 없이 무시해 버리면 그만이니까. 하지만, 피드백으로 인해 내 마음 속에 화가 생겨났다면 그건 분명 나에게 의미 있는 피드백이란 것이고 내가 왜 화를 내고 있는지에 대해서 차갑게 판단해 보아야 한다.

찔리면 화가 난다. 바로 그 때 잘 대응하는 것이 중요하다. 화가 났을 때 화를 품에 안고 질주하는 것보다는 화를 지긋이 바라봐 주는 여유가 필요하다. 그리고 그 화가 나의 부족함에서 파생된 것이라면 화는 성찰에게 바통을 넘겨주는 것이 바람직하다. 즉, 화는 성찰이 필요하다는 신호의 발생에 불과한 것이므로 더 이상 나를 좌지우지하는 권력을 행사하면 안 되는 것이다. 나를 움직일 수 있는 권력을 성찰이 넘겨 받았을 때 '화'가 생성된 보람이 있는 것이다.

찔리면 성찰해야 한다. 찔렸을 때 화가 나는 순간, 바로 알아차려야 한다. 아. 나의 성찰 역량을 작동시켜야 하는 시점이 왔구나. 여기서 화를 삭이지 못하고 화의 기운으로 일관하면 나는 성찰을 할 수 있는 소중한 기회를 날려먹는 거구나. 화를 낼 것인가 vs. 성찰할 것인가. 나는 중요한 갈림길에 서있는 것이다.

'화'는 매우 중요한 감정 메커니즘이다. '화'는 나를 열 받게 하려고 생성되는 것이 아니라 나를 도와주기 위해 생성되는 것이다. '화'는 폭발로 귀결되기 위해 생겨나지 않고 고요한 성찰의 여행길로 나를 인도해 주는 귀한 가이드인 것이다.

찔렸을 때 불같은 분노로 일관할 것인가(찔화), 찔렸을 때 차분하게 성찰할 것인가(찔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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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생과 기생 사이 :: 2013/04/01 00:01

정신기생체
콜린 윌슨 지음, 김상훈 옮김/폴라북스(현대문학)

나는 과연 온전히 하나인가?  내 안에서 상반되는 2가지 생각이 서로 다투고 갈등하고, 나도 모르는 사이에 뭔가에 홀린 듯이 감정의 파도에 휩쓸리고 합리적이지 못한 판단을 일삼고.  굳이 소설가적, SF적 상상력이 없어도 정신기생체란 말은 그닥 황당한 개념은 아닌 것 같다. 정말 내 안에 뭔가가 기생하면서 나를 끊임 없이 조종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란 생각이 가끔 드는 것이 사실이니까.

만약 내 정신 속에 뭔가가 정말 기생체의 형태로 존재한다면, 그건 나를 공격하는 적의 면모와 나 자신이란 자아의 면모를 모두 갖고 있는 것이다. 완전히 외부에서 내 안으로 유입된 유해하기만 한 존재라면 어떻게든 박멸하는 것이 답이겠으나 정신 기생체는 그렇게 무작정 적대적 대응을 하기만 해선 해결이 쉽지 않을 것이다.

부정적인 감정이 생길 때, 부정적인 감정에 사로잡힐 때, 부정적인 감정에 함몰되어 무기력해질 때.. 기생체에 의해 유린당한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한 편으론 내 안의 또 다른 나의 메세지가 나에게 전해지는 것이라고 간주할 수도 있겠다. 즉, 모든 감정을 일종의 자아 분열로 볼 수 있고 다양한 감정을 다양한 자아의 분열로 여기고 각각의 분열된 자아가 나에게 주는 느낌을 특정한 지향을 지닌 메세지라고 해석한다면 방향성은 자명해질 수 있다. 불안이란 감정이 생긴다면, 나는 나로부터 분열된 '불안' 자아가 나에게 무엇을 말하고 싶어 하는지를 해석하고 불안 자아와 대화하면서 나로부터 분열된 자아의 마음을 달래줄 수 있겠다. 그건 기생체라기 보다는 공생체에 가깝다고 봐야겠고, 나에게 공생적 메세지를 자신 만의 언어와 암호 형태로 나에게 발신하는 것이고 메세지를 수신한 나는 그 메세지에 적절하게 대응만 하면 되는 것이다. 문제는 메세지가 나에게 도달했는데 그 메세지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잘 모르는 상태에서 갈팡지팡, 좌충우돌 모드에서 벗어나지 못하면서 분열된 자아와의 커뮤니케이션이 단절되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공생의 의도로 보낸 메세지를 기생으로 오인하는 것이고 공생체를 기생체로 대우하거나 존재 자체를 인지 못하고 자아 혼란 상태에 빠지게 되면 나에게 보내진 메세지는 공중에 붕 뜬 채 갈 곳을 몰라 방황하게 되고 메세지를 받지 못한 나는 그로 인한 불이익을 어떤 형태로든 받게 된다.  

만물은 메세지이다.
나는 분열을 거듭하는 역동적 자아이고,
분열된 자아는 끊임 없이 메세지를 나에게 발신한다.

나는 메세지이자,
메세지 발신자이면서
메세지 수신자이다.

나는 결코 혼자가 아니다.
분열된 자아하고 커뮤니케이션하는데만 평생이 소요된다.
분열된 자아와 어떻게 효과적으로 어우러지면서 친밀하게 소통할 것인가?

우연히 제목을 접하게 된 '정신기생체'란 책.
그 책을 읽지는 않았지만 그 책의 제목 하나를 갖고 이런 생각을 해볼 수 있어서 즐겁다. ^^



PS. 관련 포스트
만물은 메시지다.
폰봇
맘봇
고수, 알고리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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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new toms

    Tracked from new toms | 2013/06/13 11:15 | DE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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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racked from buy toms | 2013/06/13 11:15 | DE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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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선과 거리 :: 2012/08/24 00:04

'본다는 것'은 시선을 생성하는 것이다.
나는 무엇을 보면서 나와 무엇 사이를 잇는 시선을 존재시킨다. 시선이 존재하게 되는 순간 나와 무엇은 연결되고 그 연결은 어떤 의미를 지니게 된다. 뭔가를 응시한다는 건 뭔가에 말을 건다는 것이다. 말을 거는 과정 속에서 대상으로부터 어떤 인상을 받게 되고 그 인상은 일종의 피드백이 되어 나(관찰자)를 자극하고 나는 그 피드백을 기반으로 또 다른 말을 걸게 된다. 나와 대상은 시선이란 링크를 통해 정보를 주고 받으며 나와 대상 간에 공유되는 정보는 나와 대상을 변화시키고 적응시킨다.  

'시선'은 대상과 나 사이에 거리를 생성하는 힘이다.
거리가 없으면 시선이 만들어지지 않는다. 시선은 일정한 거리를 확보해야 생길 수 있다. 거리는 일정한 크기의 시간/공간적 간격을 의미하며 그 간극은 나와 대상 사이에 긴장감을 불어 넣고 형성된 긴장은 나와 대상에게 일종의 신호를 송신한다. 나와 대상은 간극이 보내주는 신호를 각자의 방식으로 해석하고 그 해석은 나와 대상을 어떤 식으로든 커뮤니케이션하게 한다.

'거리'는 대화를 낳는다.
거리감이 없으면 대화를 할 필요가 없다. 그냥 있으면 된다. 거리감은 일종의 에너지장이다. 거리에서 관찰,인식,이해,오해,규정,왜곡,통찰,편향 등의 온갖 에너지가 생성된다. 노드와 노드 사이의 거리, 노드와 노드를 잇는 링크, 노드와 노드 간의 정보 교환, 노드와 노드 간의 이합집산.. 거리는 노드가 분포된 시공간에서 대화의 창발을 끊임없이 유도한다.  

'대화'는 스토리를 낳는다.
'거리'는 0에서 무한대까지 다양한 스케일 분포를 취하는데 그런 스케일의 다양성이 대화의 다양성을 유도하고 다양한 대화의 양상은 다양한 이야기들이 다이내믹하게 펼쳐지는 조건을 규정하게 된다.

만물은 거리와 시선을 형성하며 약동한다.
만물은 진동한다. 진동한다는 것은 거리를 호흡하며 시선을 주고 받으며 살아감을 의미한다. 모든 만물은 자신 만의 이야기를 갖고 있고 그것을 명시적/암묵적으로 끊임없이 표현한다. 이야기가 표현되는 포맷이 원체 다양하다 보니 이야기로 잘 느껴지지 않을 뿐 만물은 생물과 무생물을 막론하고 모두 소설가적 재능을 갖고 태어났고 쉴새 없이 소설가적 본능을 발휘하며 자신의 삶을 영위하고 있다. 거리와 시선을 형성하며 끝없이 어디론가 떠나는 만물의 몸짓.


우리는 뭔가를 응시할 때 무한한 에너지를 발산한다.
나와 대상 사이에 거리와 시선이 형성되며 나는 대상과 에너지를 주고 받는다.
거리와 시선은 우리에게 주어진 신비로운 축제와도 같은 선물이다. ^^



PS. 관련 포스트
연기, 알고리즘
바깥, 알고리즘
극세관심
관음 플랫폼, 페이스북
기대감을 기획하라
가격결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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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buy toms

    Tracked from buy toms | 2013/06/13 10:56 | DE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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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밀코드 해독과 진공 :: 2011/08/24 00:04

작년에 이어 올해도 역시
리처드 도킨스의 '무지개를 풀며 (Unweaving the rainbow)'를 읽지는 않는다.

그리고 올해도 역시 단지 책 제목만 보면서 문득 드는 생각이 있다.

비밀코드 해독과 진공 (2011.8.24)

비밀 코드를 해독할 때, 세상의 이치를 밝혀내기만 하는 건 아니다.
밝혀낸 만큼 비밀 코드 속으로 숨는 뭔가가 반드시 있기 마련이다.

진공은 무엇일까? 정말 아무 것도 없는 텅 빈 공간일까? 아마 아닐 것이다. 진공은 우리 인지체계로 파악이 되지 않을 뿐 분명 뭔가를 함유하고 있고 끊임없이 뭔가를 하고 있다. 만물의 기본은 원자도 아니고 소립자도 아니다. 만물의 기본은 진공이다.

원자 이하 레벨로 아무리 내려가봐야 얄미운(?) 소립자와의 기약 없는 숨바꼭질만 반복하게 될 지도 모른다. 만물의 본질은 입자를 통해 발견하기 어려울 수 있다. 만물의 본질을 파헤치려면 진공과 커뮤니케이션해야 한다. 그건 과학의 영역이 아닐 수도.

글로 뭔가를 표현할 때는 표현되지 못한 뭔가가 표현된 글의 이면에 존재하기 마련이다. 그건 마치 입자와 진공과의 관계와도 같다. 우리는 눈에 보이는 물체만 실재로 판단할 뿐, 그 물체가 끊임없이 상호작용을 나누는 진공의 존재를 항상 잊고 살아간다. ^^


PS. 이윤하님의 트윗 멘션

가능성이 아직 원자도 현상도 되지 않은, 슈뢰딩거의 1/2 고양이의 공간, 빛이 탄생하지 않은, 아원자의 세계. 무한하고 영원한, 없지만 있는 세계. 경계이전의 공간.

빛이 있으면 꼭 그림자가 있죠. 빛 이전의 무엇이 바로 그 '진공'의 세계겠죠? 아이슈타인이 빛보다 빨리 뛰어 빛 앞에 서면 무엇이 보일까 궁금해했다는데, 리드리드님도 비슷한 생각중이시군요 ^^



해독과 신념. 그리고 종교.  (2010.11.5)

무지개를 풀며
리처드 도킨스 지음, 최재천.김산하 옮김/바다출판사


서점에서 우연히 리처드 도킨스의 '무지개를 풀며 (Unweaving the rainbow)'를 접하게 되었다.

Unweaving이란 단어에 눈길이 간다. 예전에 읽은 '다윈의 식탁'이란 책이 떠오른다. 위대한 생물학자 윌리엄 해밀턴 박사의 장례식에 참석한 생물학계의 최고 지성들이 진화론에 대해 한바탕 대 설전을 펼치게 된다는 '가상 논쟁'에 관한 이야기이다.  생물학계의 거성들은 진화론의 양대 산맥이라 할 수 있는 리처드 도킨스와 스티븐 제이 굴드를 중심으로 양쪽 진영으로 나뉘어져 1주일 간 치열한 공방전을 펼치게 된다. "강간도 적응인가?",  "이기적 유전자로 테레사 수녀를 설명할 수 있나?",  "유전자에 관한 진실을 찾아서",  "진화는 1백미터 경주인가, 넓이뛰기인가?",  "박테리아에서 아인슈타인까지"  등의 주제를 놓고 리처드 도킨스 진영과 스티븐 제이 굴드 진영은 한 치의 양보도 없이 그 동안 쌓아왔던 자신들의 이론과 자존심을 걸고 팽팽한 의견 대립을 선보인다.

'다윈'이란 코드를 각자의 생각과 방식으로 unweaving하기 때문에 그 결과물은 저마다 다를 수 밖에 없다. 그 다른 결과물들에 자신만의 신념과 열정, 그리고 자존심을 듬뿍 실어 결정적인 이견이 발생할 때 격렬한 사상(?) 논쟁을 하고 있는 모습. 생물학자들은 다윈이란 성전(聖典)을 해독하고 다윈에 대한 각자의 신념을 저작하고 있으며 서로 사상이 맞지 않을 땐 격한 자존심 전쟁을 불사한다. 다윈은 가장 핫한 현대 종교다.


비밀스런 코드를 해독한다는 것.
비밀을 하나 둘 파헤쳐 가는 과정 속에서 가설과 생각은 꼬리에 꼬리를 물며 발전하게 되고 그것을 코드 해독에 결부시키면서 자연스럽게 신념은 형성되게 마련이다. 신념은 자가증식의 경향이 있어서 계속 그것을 강화시키고 확장시키려는 노력을 수반하게 된다.

비밀코드와 신념은 공생 관계다. 바로 이 기반 위에서 종교계의 교리 싸움이 작동하고, 과학이란 또 다른 종교계의 교리 싸움이 동작한다.

해독은 신념과 만나 교리를 낳는 메커니즘이 과학에서 매우 왕성해질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거대한 관전 포인트들이 앞으로 마구 나올 것 같다는 기대감이 있다고나 할까. ^^


PS. 관련 포스트
해독과 신념. 그리고 종교.
다윈, 알고리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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