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안'에 해당되는 글 12건

불안다루기 :: 2019/07/01 00:01

불안
극도의 안정을 부르는 다른 이름이다.

극도로 안정되어 있어서 불안해지는 것이다

차오르면 결국 기울어지는 원리에 불과한..

안정과 불안은 동전의 양면

그걸 구분하기 어렵다

그걸 구분하고 서로 멀리 떨어뜨려 놓으려 하는 의도에서 발생한 언밸런스

안정감을 서툴게 다뤄서 치르게 되는 어설픈 대가?

그게 불안인 것 같다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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압박 :: 2017/05/22 00:02

포텐셜
데이브 알레드 지음, 이은경 옮김/비즈니스북스

압박감에 대처하는 방법에 대해서 얘기해 주는 책이다.

압박을 느끼는 상황에서 유용하게 쓰여질 수 있는 팁들이 나열되고 있다.

압박감을 낳게 하는 불안감을 직시하고
그 불안과 대화하면서 압박감을 컨트롤하는 흐름

언어가 가진 마력(?)을 잘 레버리지해서
수단과 목적 간에 내재한 긴장감을 내 것으로 만들 수 있다면
압박을 다루는 스킬은 향상이 가능해진다.

왜 불안을 느끼는가?

이 질문에 대답하는 과정 속에서
압박감은 유들유들해진다.

그리고 불안을 형상화하고 주물럭거리는 언어 활용에 의해
압박감은 놀이감이 되어간다.

압박을 갖고 노는 법
불안을 연주하는 법

이 책은
작곡에 관한
연주에 관한
그런 책이다.

음악이다.
세상살이는.

내가 나도 모르게 작곡해낸(?) 불안이란 곡을
압박감이란 악기를 가지고
나만의 언어로 연주하는 것

그게 Pressure Principle이다.  나만의. 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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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색 로봇 :: 2017/01/23 00:03

가끔 생각과 행동을 멈추고 뇌를 응시하면
나의 뇌라는 게 참 재미있게 작동하는 것 같다.

끊임없이 뭔가를 찾고 있는 검색 로봇 같다.
뭘 찾고 있는가라고 물어보면 나의 뇌는 이렇게 답한다.
"난 불안을 찾고 있어"

왜 그걸 찾느냐고 묻는다. 그럼 나의 뇌는 이렇게 답한다.
"그냥.. 불안을 찾는 것 자체가 나의 존재 이유가 아닌가 싶기도 해."

불안을 찾으면 편안해지는가라고 묻는다.
"아니, 더 불안해져."

도대체 왜 그러냐고 묻는다.
"그게 내가 살아있는 증거자나." ㅋㅋ"

존재를 확인하기 위해 불안을 찾는다고?
불안 말고 다른 건 없어?

"글쎄, 그것만큼 절실하게 찾고 또 찾아도 갈증이 심한 게 있을까?"

이런 대화를 하다 보면,
'불안'이 편안해진다.

불안 자체가 목적이라면
불안해질 수 있는 이유를 찾는 게 내 뇌의 본능이라면

불안을 검색하는 로봇과도 같은 내 뇌에 대해서
가끔 말을 걸 수 있는 나라면

불안을 검색하는 과정 속에서
그 로봇과도 같은 행위를 내가 인지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고
그렇다면 이제 내 뇌가 찾아다니는 불안은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든 것이겠다.

머리 속에 검색 로봇 하나가 들어 앉아서 끊임없이 검색을 해대는 상황.
그 상황을 들여다 보면서 나는 나를 아주 조금씩 알아나가는 것 같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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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울폰 :: 2016/02/19 00:09

지하철, 버스, 거리..

폰을 보는 사람들이 참 많다.

그렇게 폰 속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모습 속에서

난 거울을 본다.

폰은 거울이다.

사람들은 폰을 갖고 여러가지 행동을 하지만
결국 하는 행동은 '나'를 보는 것으로 귀결된다.

폰 속에 비친 나 자신의 모습을 보는 것.

그런데..
거울은 그렇게 많이 볼 필요가 없는 도구이다.
그저 필요할 때 잠깐만 보면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거울을 자주 본다는 건
불안함을 의미한다.

결국 사람들은 폰을 수시로 들여다 보면서
불안을 표현한다.

그리고 표현된 불안은 폰 속에 투영되면서 또 다른 불안을 생성하고
그렇게 만들어진 불안은 폰에 대한 집착을 더욱 가중시킨다.

거울을 자주 보는 악순환 구조는 그렇게 고착화 되어간다.

세상에서 제일 많이 보급된 제품.. 거울 폰..
그건 세상에 불안이 거대한 규모로 생산, 배급, 배포, 복제되고 있음을 의미한다.

불안한 만큼 거울폰을 자주 보게 되는 이 시대.
폰 속에 비친 불안한 나의 모습.
그 모습이 안정을 찾을 때, 폰은 거울이 아닌 한낱 도구로 바람직하게 전락할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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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확실 :: 2013/08/02 00:02

불확실성은 두려움을 낳고 불안을 낳는다. 인간은 두려움/불안에 매우 취약하다. 그래서 인간은 불확실성에 대한 본능적 거부감이 있다. 사실 불확실성은 가치 중립적 개념인데도 말이다. 불확실성을 직시하고 그것이 긍정의 불확실성과 부정의 불확실성을 모두 내포하고 있다는 명백한 사실만 잊지 않는다면 불확실성에 대한 인간의 태도는 새로운 국면을 맞이할 수도 있겠다.

불확실성을 논의하기 이전에 인간 상태 자체부터 먼저 짚어 보자. 누구나 매일 잠을 자고 매일 잠에서 깨어난다. 잠에서 깨어났을 때의 나의 상태에 대해 생각해 보자. 어제 잠들기 전과 비슷한 몸 상태인 경우가 대부분일 경우다. 몸은 서서히 노화하기 때문에 하룻밤 사이에 갑작스런 변화가 일어나진 않는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의미 있는 태도를 형성할 필요가 있다.

잠에서 깨어났을 때 나의 상태를 어제의 나와 비교하는 것. 그게 맞는 건가? 오늘 아침의 내가 어제 밤의 나와 똑같아야 하는 법이 있는가? 어제와 오늘의 나를 단절시켜 놓고 오늘의 나를 '무(無)'와 비교해 보자. 불확실성의 시대를, 아니 불확실성이 원래부터 가득했던 세상을 살아가면서 왜 어제 잠들기 전의 나와 오늘 아침 깨어난 나 사이에 연속성이 반드시 존재해야 한다고 생각하는가? 오늘 아침의 나를 어제와 별반 다를 게 없는 나가 아닌 '무'에서 홀연히 등장한 놀라운 '유'로 규정하면 안 되는가? 사실 어제와 별반 다를 게 없는 오늘의 나 자체가 충격이고 기적 아닌가? 어떻게 그렇게 뻔뻔하게 연속성을 유지할 수 있는 건지 궁금하지 않은가? 



인간은 수시로 디폴트를 체크하며 현재 상태를 살핀다. 항상 기준점을 필요로 하면서 수시로 자신의 상황을 비교할 대상을 찾는다. 그런데, 그건 인간 인지력의 나약함을 더욱 강화시킬 뿐이다. 비교하면 할수록 자신에 대한 판단력은 약해진다. '나'는 그저 나일 뿐인데 자꾸 나를 뭔가와 비교하는데 몰입하면 '나'는 흐릿해져만 가고 흐릿해진 나를 바라보며 점점 불안감은 증폭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자꾸 뭔가를 디폴트로 규정하고픈 본능을 살짝 눌러주면서 디폴트 '무'의 법칙을 서서히 몸으로 익혀 보자. 오늘 아침 깨어난 나의 모습을 디폴트 '유'(어제 잠들기 전의 나)와 비교하지 말고 디폴트 '무'와 비교해 보자. 불확실성에 디폴트 '무'의 법칙으로 대응해 보자. 그럼 불확실성은 사실상 아무 것도 아닌 게 되어 버린다. 불확실성은 디폴트 유의 법칙이 강력하게 작동할 때 권력을 갖는 것이지 디폴트 무의 법칙을 인간이 활용하는 순간부터 불확실성은 거대한 불안/공포에서 왜소한 역동성 정도로 리포지셔닝될 것이다. 



핵심은,

인간의 뇌리를 환영처럼 지배하는 개념을 객체화시키면 모든 것이 자명해진다는 것.

나는 알아가는 것 같다. 다른 사람들이 아무렇지도 않게 당연시 하는 일상들의 흐름이 내겐 기적과도 같은 것이라는 것을. 그리고 다른 사람들은 현재의 자신과 대비해서 모든 것을 판단하지만 나는 그게 결코 당연하지 않다는 것. 나의 현재는 '무'와 비교되어야 하는 긍정적 충격이라는 것을. 나는 항상 충격과 기적 속을 살아가는 것이다.
긍정적 충격과 기적이 내 안에서 수시로 작동하고 있는데 뭘 불안해 하는가? 세상에 만연한 불확실성보다 훨씬 역동적인 시스템이 내 안에 있는데 나는 그렇게도 파워풀한 것을 들고서 왜 덜 파워풀한 것에 기가 죽는가?

디폴트 '무'와 항상 나를 비교하자. 그럼 불확실성이 매우 순한 어린 양처럼 보일 것이다. ^^




PS. 관련 포스트
욕망은 수동태이다.
불확실성, 불안, 그리고 BM
예측, 알고리즘
극단, 알고리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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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 응시 :: 2013/02/01 00:01

나는 무엇을 응시하는가?  내 시간의 대부분은 무엇을 응시하는데 사용되고 있을까? 돈? 명예? 권력? 우월? 안전? 감정?  그런 것들에 소비되는 시간은 과연 가치 있는가?

돈을 응시하고 그것을 동경하면 어떤 모습이 벌어지는가?  돈을 follow하면 매일 돈에 관한 근심,걱정,불안이 나의 마음 속으로 feed된다.  트위터,페이스북 앱을 실행하고 끊임없이 타임라인에 출몰하는 정보들을 기계적인 손놀림으로 스캐닝하는 로봇스런 사용자 행동과 별반 다를 것 없는 상황이 연출될 것이다. 마음은 온통 돈에 관한 피드로 범람할 것이고 그 피드들을 제대로 소화하지도 못한 채 시간은 하염없이 흘러갈 것이다.

명예도 권력도 우월도 안전도 다 마찬가지이다. 뭔가를 바라게 되면 그것에 관한 불안이 자생적으로 성장하게 되면서 끊임없이 마음 속 타임라인을 장악하게 된다. 단지 하나의 단어일 뿐인데 그 단어가 자행하는 타임라인 난자의 수준은 정말 무자비할 지경이다.

어떤 대상을 응시하는 것은 인간으로 살아가는 한 결코 회피하기 어려운 본능에 가까운 몸짓이다. 응시하라고 디자인된 몸을 갖고 태어나서 어떻게 응시하지 않고 살아갈 수 있겠는가?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마음 속 타임라인을 온통 그런 쓰레기 같은 피드 정보들로 가득 채우고 살아가는 건 생을 영위하는 자로서 매우 자존심 상할 수 있는 일이다. ^^

마음이란 이름의 타임라인. 마음 자체를 응시해 보자. 내 마음 속에 지금 무엇이 피드되고 있는지 살펴보자. 지금 이 순간 내 마음 속에 무심코 피드된 정보가 나의 어떤 follow 행위에서 비롯된 것인지 근원을 추적해 보자.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내가 follow한 것에 관한 정보가 내 마음 속에 들어오는 것이지 내가 follow하지 않은 테마는 결코 내 안에 피드를 형성할 수가 없다. 내 마음 속 타임라인은 철저히 내가 선택한 것들로 가득 채워지는 것인데 그 모습을 응시하지 않고 그저 피드된 정보들에 의해 내가 속절없이 좌지우지되는 것은 매우 허무한 일이다.

가끔은 내 마음 속에 무차별적으로 들어오는 피드들 중에 영 아닌 것은 unfollow를 시도할 필요가 있다. 물론 그게 쉽지는 않겠지만 말이다. follow만 하고 unfollow를 하지 않으면 타임라인은 오염에 오염을 거듭할 수 밖에 없다. 오염을 막기 위해서는 타임라인을 stock이 아닌 flow의 상태로 유지해야 한다. 타임라인 플로우의 신선도를 유지하기 위해 내가 팔로우한 테마들을 쭉 점검해 보자. 그 중에 나를 유독 무기력하게 만드는 테마가 있다면 그로 인해 내 마음은 무척 혼란스런 상태에 놓여 있을 것이다. 내 마음을 응시하고 내 마음을 힘들게 만드는 테마를 찾아내는 노력.  너무나 vulnerable한 마음 타임라인에 한 줄기 희망을 제시하는 몸짓이 될 것이고 그로 인해 바뀌어 가는 나의 모습은 마음 피폐화 시대를 거스르는 리버스엔트로피적인 변혁의 단초가 될 것이다.

하루에 단 5분이라도 나의 마음을 응시하는 것. 길을 잃고 헤매는 현대인들에겐 너무나 소중한 시간일 수 밖에 없다. 세상은 정확히 두 종류의 사람으로 양분된다. 마음을 응시하는 자와 마음을 응시하지 않는 자로 말이다. ^^





PS. 관련 포스트
'타임라인'이란 이름의 감옥
내가 나를 뒤에서 지켜보는 느낌
맘봇
마음 건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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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buy toms

    Tracked from buy toms | 2013/06/13 10:47 | DEL

    I visited various blogs except the audio quality for audio songs existing at this web site Read & Lead - is really marvelous.

  • toms sale

    Tracked from toms sale | 2013/06/13 10:48 | DEL

    Hahahahahahaha, this politics related YouTube video is actually so funny, I liked it. Thanks in support of sharing this %title%.

  • BlogIcon wealandwoe | 2014/09/02 12:50 | PERMALINK | EDIT/DEL | REPLY

    내 마음이 내것이긴 한걸까? 싶을 정도로 선택을 해야 하는 지금. 너무 혼란스러워요.
    마음의 소리에 귀기울이고 싶으나 자꾸만 같은 혼란으로 다가와요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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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쟁 노예: 이기고 웃는 노예, 지고 우는 노예 :: 2013/01/28 00:08

자본주의 사회를 살아가면서 부/권력/지위/명예와 같은 속물적 덕목으로부터 자유롭기는 매우 힘들다. 아니 심지어는 그런 속물적 스펙에 인생을 걸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다.

왜 사람들은 자신보다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며 살아가는 삶을 선택하게 되었을까? 

아주 오래 전부터 인간 유전자에 깊게 새겨진 '두려움' 때문일 것이다.
두려움은 원래 생명 위협 상황에서 가치를 발휘하는 기제인데 문명이 발전하면서 수시로 생명을 위협받는 상황이 현저하게 줄어든 지금도 '두려움'은 인간 사회를 강하게 압박하며 인간들을 두려움 숭배 로봇으로 만들고 있는 듯하다. 만약 인간의 마음 속에 두려움이 없다면, 남의 시선을 의식하고 그 시선에 합당한 스펙을 갖추기 위해 자신의 인생 전체를 던지듯 로봇처럼 살아가는 행태가 과연 이렇게 만연했을까?

부,권력,지위,명예는 유한 자원이라서 그걸 남보다 많이 획득하려는 경쟁이 필연적으로 발생한다. 마치 속물적 덕목을 남보다 더 많이 획득하기 위해 태어난 존재마냥 인간은 인생 전체를 걸고 그것을 획득하기 위한 대장정에서 헤어나올 생각을 하지 않는다. 그 광경은 정말 우주적 장관이 아닐 수 없다. 도대체 이런 개그적 대서사시를 누가 기획하고 운영하고 있는 것인지 정말 이 상황을 주재한 존재가 있다면 그 존재에게 찬사를 보내고 싶다. 보면 볼수록 놀랍고 그 안을 살아가는 내 자신이 놀랍고 이런 체계가 굴러가고 있다는 것 자체가 초대형 블록버스터 판타지 무비가 아닐까 싶다. (일상이 이렇듯 거대한 영화관인데 뭐 하러 극장에 가는가? ^^)

무엇보다도 이런 놀라운 상황을 가능케 하는 동력인 '두려움'에 박수를 보내고 싶다. '두려움'은 정말 대단한 힘을 갖고 있다. 자신을 망각하고 오직 자신을 상품으로 규정하고 자신의 상품 가치를 드높이기 위한 무한 경쟁 상황 속에 자신을 내던지는 인간소외적 행위, 몰지각한 행위를 당연시하며 인간을 살아가게 하다니, 도대체 두려움 너는 인간에게 무슨 짓을 하고 있는 것인가? ^^

경쟁지상주의 사회가 낳은 가관을 보면서 두려움에 최상급 찬사를 보내지만, 이 게임에서의 승자는 두려움 하나라는 게 참 안타깝다. 무한경쟁에 뛰어든 수많은 인간들은 두려움이라는 유일한 승자의 발 밑에 엎드려 두려움을 경배하고 두려움에 유린당하는 비참한 패배자에 불과하다는 것. 그것을 두려움은 계속 즐겨왔고 앞으로도 그럴 것인데. 경배를 드리면 경배 드린 만큼 그에 합당한 대우나 케어를 받아야 하는데, 왜 인간은 두려움에 인생 전체를 건 경배를 드리고 두려움으로부터 잔인한 희롱을 당하는 것일까?

경쟁의 결과는 승리도 아니고 패배도 아니다. 남과 자신을 비교하는 순간, 나는 나 자신을 일개 범용품으로 전락시키는 것이고 범용품으로 살아가는 한 승리도 패배도 아무런 의미가 없다. 남보다 돈을 많이 벌고 남보다 더 좋은 직장에 다니고 남보다 더 좋은 집에 살고 남보다 더 높은 지위에 오르고 남보다 더 많은 존경을 받고...  아뿔싸~ 여기엔 '나'란 단어가 존재하지 않는다. 오직 타인만 존재한다. 이게 나 자신을 위한 삶일까? 아니면 남을 위한 삶일까? 우리가 언제부터 이렇게 이타적인 존재였을까? 그리고 이게 과연 이타적 삶일까? ^^  

경쟁의 결과는 인간소외이고 완벽한 범용품으로의 전락이다. 그게 경쟁의 본질이다. 경쟁을 의식하며 살아가는 삶, 경쟁에서 중요시 하는 스펙에 목을 매며 살아가는 일상 속엔 공허함만이 가득하다. 설사 거기서 좋은(?) 성과를 얻었다고 해도 곧 또 다른 갈증이 찾아오고 근원적 두려움은 점점 나의 목을 조르며 나를 더욱 강하게 압박해 들어올 뿐이다.

결국 "내가 중요시 하는 덕목 속에 내가 존재하기는 하는 건가?"란 질문을 던지는 게 중요하고 그 질문 속에 내가 없고 온통 타인이 가득하다면 나는 뭔가 잘못 살아가고 있다는 인정을 해야 할 것이다. 남이 정의한 성공 패러다임, 남이 정의한 행복 패러다임의 바다 속을 해면동물처럼 살아가는 인간의 모습. 두려움이 이끄는 삶. 두려움을 경배하고 두려움으로부터 유린 당하는 삶. 그리고 그걸 인지 못하는 삶. 참 허무한 거다. ^^

나중에 시간이 흐르고 흘러 생을 마감하는 순간이 올 때, 아래와 같이 자문해 보자.

"나는 살아가면서 경쟁 말고 한 게 뭐가 있는가?" 

이 질문에 오직 경쟁에서 이기기 위한 게임만을 했다라는 답이 나온다면 그건 정말 비참한 것이다. 왜? 경쟁은 이겨도 지는 게임이니까. 왜 지는 게임을 하는가? 왜 유일한 승자인 두려움에게 퍼주기만 하는가? 왜 승리와 패배만 존재하는 유아적이고 치기 어린 이분법 논리가 지배하는 저급한 프레임에서 평생을 보내는가?  과자 하나 주면 헤헤거리고 과자 안 주면 앙앙 우는 유아. 그게 경쟁 프레임 속에 갇힌 인간의 모습인 건데. 아무리 나이를 먹어도 과자 하나 얻어 먹으려고 떼쓰고 헤헤거리고 앙앙 우는 인간으로 살아가야 하다니. 인간이 그렇게 병신 같은 존재인 건가? 두려움을 숭배하고 두려움에 유린당하는 인간. 그건 노예다.

경쟁에서 이기고 웃는 노예, 경쟁에서 지고 우는 노예. 노예들이 가득한 세상.  나 자신이 노예임을 일단 인지라도 하고 살아가야 한다. 그래야 언젠가는 노예스런 삶의 굴레에서 벗어나 정말 나 자신을 아끼고 나 자신을 사랑하며 살아갈 수 있는 것 아니겠는가?  

블로깅을 하면서, 경쟁에서 이기고 웃는 노예들과 경쟁에서 지고 우는 노예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경쟁은 애니팡, 드래곤플라이트, 다함께차차차를 하듯 걍 가볍게 즐기고 말면 되는 게임이고 그 게임의 유일한 승자는 두려움인 것인데 경쟁의 결과를 놓고 왜 웃고 우는지 난 그 이유를 잘 모르겠다. 그렇게 두려움의 지배력을 키워주기 위해 웃고 우는 에너지를 다 허비하면 정작 나를 위한 에너지를 어떻게 수급할 것인지. 인간은 정녕 두려움의 힘을 키워주기 위해 태어났고 한 평생을 오직 두려움만 경배하며 살아가야 하는 건가?

블로깅을 하면서 경쟁의 본질을 볼 수 있게 된 것이 너무 다행스럽다.
블로깅을 하지 않았다면 이런 개그적 스펙터클 상황을 전혀 인지하지도 못한 채
난 지금도 여전히 경쟁 노예로 살아가고 있었을 테니까. ^^



PS. 관련 포스트
쪽팔리고 싶지 않은 욕구
욕망은 수동태이다.
사라진 원인, 좀비가 된 결과
타존, 알고리즘
자존, 알고리즘
우열, 알고리즘
경쟁, 알고리즘
소외, 알고리즘
제허, 알고리즘
비교, 알고리즘
범용, 알고리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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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BlogIcon The Black Ager | 2013/01/28 19:33 | PERMALINK | EDIT/DEL | REPLY

    사실 두려움은 자본주의 사회 뿐 아니라 공산 사회, 독재 사회, 유목 사회, 봉건 사회 등 체제와 시대를 초월해서 늘 인간의 생존을 위협해온 '존재'인 거죠. 애초에 신의 관념이 생긴 이유도 두려움 때문일텐데, 신이 아무런 의미가 없어진 현대 문화권에서 이제 두려움은 자기 자체를 신격화함으로서 마지막 발악을 하고 있다고 생각해요. 경쟁에서 이기는 게 문제가 아니라, 진짜, 경쟁 시스템을 이기는 게 과제인 듯 합니다. ^^

    • BlogIcon buckshot | 2013/01/28 20:45 | PERMALINK | EDIT/DEL

      제가 너저분하게 늘어놓은 글자들의 어지러움을 딱 한 문장으로 요약해 주시네요. ^^

      "경쟁에서 이기는 게 문제가 아니라 경쟁 시스템을 이기는 게 과제이다."

      존경스럽습니다. 넘 감사드리고 싶구요~

  • 휘리릭킴 | 2013/03/11 15:46 | PERMALINK | EDIT/DEL | REPLY

    그 두려움이라는 단어가 열등감과 오기로 쓰일 수 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경쟁 속에 살아가는 우리는 타인을 넘어서야만 한다는 강박관념에 시달리고, 실제 적은 우리보다 더 커 보일 때가 많으니까요..특히 저 같은 경우는 말이죠..^^;;
    또 한편으로는 그 벅샷님이 말한 그 두려움을 무작정 이기려만 하다보니, 또 정작 타인이 보는 나와 내 자신이 보는 나와의 거리감도 생기고 있는 중입니다.
    하...정답이 없는 것 같아요.ㅎㅎ

    • BlogIcon buckshot | 2013/03/11 19:50 | PERMALINK | EDIT/DEL

      두려움은 인간유전자에 깊게 새겨진 코드이기도 하고 인간소외의 경쟁시스템을 서포트하는 거대한 동력이기도 해서 감히 제압하기는 쉽지 않은 상대입니다.

      하지만, 매번 두려움에 맥없이 제압당하기 보다는 아주 가끔씩이라도 두려움을 상대로 멋진 저항, 또는 가벼운 승리를 거두는 경험을 지속하게 된다면 인간의 삶은 보다 더 풍요로워질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블로깅은 두려움 희롱 놀이를 지속하기 위한 좋은 시공간이겠구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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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감, 시선을 응시한다는 것 :: 2012/09/10 00:00

사람은 대개 인정받고 싶은 욕구를 갖고 있다. 인정을 받으면 자신의 존재와 가치를 확인하는 쾌감을 느낀다. 그래서 인정받기 위한 노력을 부단히 전개하고 인정을 받지 못하면 제법 불안해 한다. 인간은 인정을 먹고 사는 것이다.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는 순간, 인간은 사선이란 권력의 지배권 안에 편입되는 것이고 그 지배권 안에서 시선의 온도에 일희일비한다.

인정은 시선을 전제로 한다. 시선은 권력 구도의 배치를 의미한다. 보는 자와 보이는 자 간에 나눠지는 권력의 위계질서. 인정받고 싶어하기는 잘 보이고 싶어하는 것이고 잘 보이고 싶어하는 것은 자신을 '보이는 자'로 명백하게 규정하는 것이다. 시선은 함정을 내포하곤 한다. '시선'의 맥락 속에 포지셔닝되는 순간 자신도 모르게 '보이는 자'의 낮은 지위(?)에 지나치게 충실한 나머지 자존감을 상실한 채 타존의 파도에 휩쓸려 다니며 '잘 보이기'에 지나치게 몰입하는 우를 범할 수 있다. 시선을 의식하면 할수록 시선 플랫폼 상의 하위 계급 삶 속으로 늪처럼 빠져 들어가는 것. ^^

인정을 받고 싶다는 욕구가 지나치게 강할 경우, 자신을 스스로 높이고 남이 그걸 알아주길 간절히 바라게 된다. 인정은 타인이 해주는 것인데 말이다. 자신을 스스로 높이고자 노력하는 자는 시선의 권력구도를 신봉하는 자이다. 시선의 권력에 철저한 지배를 받으면서 시선을 응시하지 못하고 시선이 뿜어내는 인간비하적인 눈빛을 온 몸으로 영접하면서 시선으로부터 끊임없이 좋은 평가를 받아내고 싶어하는 자. 영원한 시선의 하수인인 것이다.

인간은 영원한 '시선의 노예'로만 살아가야 하는가? 시선을 꼴아 보면 안 되는가? 시선을 직시하고 시선을 평가하며 시선에 시선으로 맞설 수 있는 용기가 인간에겐 정녕 없는 것일까? 인간은 시선의 하수인으로 프로그래밍되어 있는 것은 맞다. 하지만 소프트웨어의 메커니즘이 인간에 의해 간파 당하는 순간 인간은 그 소프트웨어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지 않을까? ^^

자신감은 자기를 낮출 수 있는 능력에 비례한다. 자신을 멋지게 낮출 수 있으려면 자신에 대해 정확히 파악하고 있어야 한다. 자신감이 강한 자는 자신을 소재로 자신의 본질을 관통하는 고도의 자기낮춤형 유머를 행할 수 있는 자이다. 자신을 낮출 수 있다는 것은 시선을 응시할 수 있다는 것이다. 시선을 응시하면 시선 속에 내포된 유치한 유치원형 권력구도를 한 눈에 들여다 볼 수 있게 된다. 인간은 나이가 먹어도 유아 마인드에서 쉽사리 벗어나기 어렵다. 껍데기스러운 매너나 포장술로 자신을 어른으로 포지셔닝시킬 뿐, 인간의 본질은 인간을 유린하는 각종 소프트웨어에 의해 철저히 조종당하는 수동적 유아 로봇에 불과하다.

자신/타인에 대한 깊은 관심과 정확한 이해를 바탕으로 자신의 약점을 즐겨 얘기하고 타인의 강점을 즐겨 얘기하는 자는 자신감이 강한 자이다. 강점과 약점은 연결되어있기 마련인데 자신의 약점을 당당히 얘기하면 약점 뒤에 숨은 강점의 향취가 풍겨나게 된다. 반면 자신의 강점을 얘기하며 자신을 의식적으로 높이려 하면 강점 뒤에 숨은 약점의 스멜이 자연스럽게 풍겨 나온다. 그래서 약점을 당당하게 얘기하는 게 강점을 우쭐대며 얘기하는 것 보다 나와 타인을 둘러 싼 공기의 질을 훨씬 더 높이게 된다. 시선 플랫폼의 인간비하형 공기를 호흡하기 보다는 서로를 도구가 아닌 목적으로 대하면서 자신이 갖고 있는 향취를 자연스럽게 공유하는 것이 훨씬 에코 친화적인 행위가 아닐까?

시선을 응시한다는 것.
시선에 함유된 권력구도를 간파한다는 것.
더 이상 자신을 높이려 애처로운 노력을 실행할 필요가 없다는 것.
자신을 낮추는 자는 시선을 시선하는 자이다. ^^


PS. 관련 포스트
타존, 알고리즘
자존, 알고리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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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안감 :: 2012/07/02 00:02

여자의 마음은 거짓말을 한다
에이미 알러스 지음, 안기순 옮김/비즈니스북스


나는 무능해, 나는 예쁘지 않아, 똥배와의 전쟁에서 승리할거야, 나는 사랑스럽지 않아, 나는 능력이 없어, 내 잘못이야, 나는 어디에도 속하지 않아, 나는 부족해, 나는 정말 가난해..

이런 자기비하(?)적인 속마음의 근원은 무엇일까?  왜 이런 식으로 능력,외모,부,소속 등에 대한 높은 기준 설정과 그 기준을 충족시키지 못하는 결핍감을 항상 견지하고 살아가는 걸까?  인간은 불안을 추구하고 평생 불안감을 유지하기 위해 태어난 것인가? ^^

끊임없이 불안해 한다는 것은 "아무 생각 없이 가만히 있으면 다친다"라는 위기감을 암묵적으로 갖고 있음을 의미한다. 계속 뭔가를 하면서 불안감을 억제하고 뭔가로부터 뒤쳐지고 소외되지 않으려 하는 무의식적인 몸부림을 치는 것인데..

인간이 주체란 생각을 잠깐 잊어버리면..
인간이 불안감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계속 불안해 한다기 보다는,
'불안감'이 자신의 존재를 확인하기 위해 인간을 계속 불안하게 하는 것이 아닐까 싶다.

만물은 항상 진동하고 있고 끊임없이 어디론가 흘러간다. 그런 FLOW의 세계를 작동시키는 기본 원리가 '불안감'이 아닐까 싶다. '불안감'은 나무를 움직이고 돌을 움직이고 바람을 움직이고 지구를 움직이고 우주를 움직이고 분자를 움직이고 원자를 움직이고 양자를 움직이게 한다.

만물은 불안하다.  '불안감'이 만물을 작동시킨다. '불안감'은 계속 FLOW하기를 원한다. '불안감'은 끊임없이 흐르면서 자신의 존재감을 확인한다. 인간은 만물의 아주 극히 일부인 무엇이다. '불안감'은 인간을 절대로 그냥 내버려 두지 않는다. 끊임없이 인간에게 자신을 주입시키면서 인간으로 하여금 자신에게 대응하게 한다. 만물에 내재한 '불안감'이 인간에게도 스며들어 있는 것이고 인간은 그런 '불안감'의 존재를 끊임없이 확인하도록 프로그래밍되어 있는 것이다.

인간이 존재를 확인한다기 보다 '불안감'이 자신의 존재를 만물의 불안 진동을 통해 확인하는 것이고, '불안감'은 자신의 존재감에 지배당하는 존재에게는 더욱 큰 선물을 내려준다. 더욱 큰 불안 선물을 받은 인간은 평생을 불안과 함께 불안해 하며 살아간다.

하지만,
'불안감'은 인간이 자신에게 어떻게 대응하는지 자신과 어떻게 소통할 것인가에 대해선 아무런 팁도 주지 않는다. 그런 건 인간이 알아서 해야 하는 것이다. '불안감'에게 맹목적으로 지배당하기만 할 것인지, 아니면 '불안감'과 소통하면서 나름의 입장과 존재를 선명하게 밝혀 나갈 것인지는 오로지 인간의 의지와 행동에 달려 있다. 만물을 내재하고 있는 '불안감'의 조종을 무의식적으로 수용하기만 해서는 안 된다. 현명한 독자가 저자와 생산적인 소통을 하면서 저자와는 사뭇 다른 텍스트를 생성하는 새로운 창조를 행하듯이, 지혜로운 인간은 '불안감'의 지시를 일방적으로 수용하진 않는다. 끊임없이 '불안감'과 대화하고 토론하면서 '불안감'에게 영감을 주고 '불안감'을 인간 존재 확인의 도구로 활용한다.

존재 확인의 주체가 누구인가?  '불안감'인가? 인간인가? 아무 생각 없이 살아가면 인간은 자신의 존재가 아닌 '불안감'의 존재를 확인하기 위해 소모품처럼 쓰여지는 도구에 불과할 것이다. 도구로 사용되는 것과 도구를 사용하는 것은 딱 한 끗발 차이다. 하지만 그 차이는 거대하다. '불안감'의 존재를 확인시켜 주기 위해서 살아가는 건 좀 아쉽다. '불안감'의 존재를 명확히 인식하고 그것과 대화하는 과정을 통해서 '나'의 존재를 확인해야 한다.

만물은 불안하다.  '불안감'이 만물을 작동시킨다.
인간은 '불안감'과의 대화를 통해 자신을 확인한다. ^^




PS. 관련 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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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안, 알고리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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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확실성, 불안, 그리고 BM :: 2011/12/23 00:03

우리는 불확실성이 커지고 있다는 말에 쉽게 동의하는 경향이 있다.  전 세계가 쓰나미, 블랙스완을 연상케 하는 극단적 상황에 대한 마음의 준비도 해야 한다는 식의 겁주기 메시지에 나름 순응적 태도를 보일 때가 많다. 그런데, 정말 그런 걸까? 세상은 불확실성 급증의 도가니 속으로 빨려 들어가고 있는 것일까? 

불확실성이 커지는 이유를 외부 환경의 격변으로 치부할 수도 있겠고, 불확실성이 커진다고 느끼고 표현하는 것이 알기 쉬울 수는 있겠으나, 실상은 불확실성이 급증한다기 보다는 불확실성을 급속하게 인식하게 되었다는 표현이 더 정확할 수 있겠다. 즉, 극적인 변화는 외부 환경의 불확실성의 수위 보다는 그것을 인식하는 인간의 마음 속 불안감의 수위에서 나타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불확실성은 예측용이성/통제용이성의 반대 의미를 가진다. 인간은 항상 뭔가를 더 예측하고 싶어하고 통제하고 싶어하는 마음이 커지는 쪽으로 시간을 보내왔다. 문명의 발전을 통해 인간의 외부 환경에 대한 예측력과 통제력은 비약적인 고도화를 거듭했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으나 그건 거대한 착각일 수 있다. 자고로 문명이 발전되는 동안 인간이 정말 질적 성장을 기록한 것인가라는 질문에 대해선 쉽게 대답이 잘 되지 않는다. 원시시대 대비 생명 위협이 현저히 낮아졌음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그닥 위험하지 않은 것에 대한 두려움을 양산하며 두려움의 총량을 유지하고 있다. 원시시대나 현대나 인간은 두려울 것이 있어야 안심한다. 인간 뇌는 두려움을 먹고 사는 기관이다. 인간 뇌는 마치 두려움이 유통되지 않으면 심심해서 미쳐버릴 수도 있다는 듯 끊임없이 두려움을 생성하고 소비한다. 문명 발전이 산출한 최대의 성과는 '원시시대의 원초적 두려움을 현대의 세련된 두려움으로 치환시킨 것'이 아닐까. 인간 뇌 속에 똑같은 두려움이 유통되면 인간 뇌가 지루해할까 봐 끊임없이 새로운 두려움을 인간 뇌 속에 주입시킨 것이 문명의 주요 과업이 아니었을까. ^^

예측용이성, 통제용이성을 높여간다는 착각 속에서 인간은 끊임없이 새로운 형태의 불안을 생산했고 그것을 적극적으로 소비했다. 그리고 그런 생산-소비의 순환 고리 속에서 불안 BM은 지속적인 성장을 거듭했다. 어느 시대나 인간 마음 속에 잠재한 불안을 자극하고 증폭된 불안에게서 돈을 뜯는 불안 BM이 존재했다.  


불확실성이 커진다는 것. 불안감이 커진다는 것. 두려움과 끝없는 숨바꼭질을 하고 싶어하는 인간 뇌를 자극하는 불안 BM의 존재. 불확실성, 불안감, 불안 BM은 매우 견고한 삼각편대 체제를 구성한다. 그 강력한 삼각 압박에 너무 많이 농락당하면 세상은 정말 불확실성의 소용돌이로 보일 것이다. 불안 BM을 직시하면 불안 BM에게 주입을 강요 받았던 내 마음 속 불안감은 실체성 여부를 검증 받게 것이다. 그리고 불확실성이란 단어에서 불필요한 강박은 필터링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이제 더 이상 불확실성이란 단어를 당연한 느낌으로 어리버리 수용해선 안 된다. 확실한 것 하나만 견지해도 불확실성이란 단어는 충분히 무력화시킬 수 있다. 확실한 것 하나는, 실체 없는 불확실성과 뜬금 없는 불안감을 똑바로 쳐다볼 수 있는 용기가 우리에게 있다는 것이다. ^^



PS. 관련 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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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측, 알고리즘
[변화관리] 두려움 vs. 통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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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더십과 에너지 관리 :: 2011/09/16 00:06

조직은 에너지가 순환하는 시스템이다.

조직 내에 불안 에너지가 유통될 수도 있고 생산 에너지가 흘러 다닐 수도  있다.

조직은 생존을 지향하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불안을 생성하게 된다.

리더십은 불안에 대한 대응력과 긴밀한 관계가 있다.

불안을 그대로 포워드하거나 심지어 증폭시키는 것은 리더가 해서는 안 되는 일이다.

리더는 '불안' 에너지를 '생산' 에너지로 전환시킬 수 있어야 한다.

리더십은 일종의 에너지 관리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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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재와 불안
의도
가치 생태계
[허준-동의보감-신형장부도] 기는 통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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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BlogIcon The Black Ager | 2011/09/16 18:31 | PERMALINK | EDIT/DEL | REPLY

    리더다우신 안목이신 것 같아요... ㅎ buckshot님 추석 평안히 보내셨지요? 저는 오늘 '신검'을 받으러 다녀왔습니다~ 나라는 조직의 점점 커져가는 불안을 어떻게 생산 에너지로 바꿀 수 있을지 고민이예요. 행복하고 풍성한 가을 맞이하시길 바랍니다. :)

    • BlogIcon buckshot | 2011/09/17 19:33 | PERMALINK | EDIT/DEL

      안녕하세요, 추석 잘 보내셨죠? ^^ 저도 잘 보냈습니다~ 신검을 받으실 수 있는 젊음이 부럽습니다. 불안과 생산 사이를 절묘한 균형감으로 곡예하는 것이 인생인가 봅니다. 즐거운 주말 보내세요~ ^^

  • BlogIcon 똥꼬아빠 | 2011/09/18 16:45 | PERMALINK | EDIT/DEL | REPLY

    인간에 대한 평등과 성과에 대한 차등! 받는사람이나 주는 사람이나 무척이나 껄쩍찌근합니다.
    짧은글 한참 보았습니다.

    • BlogIcon buckshot | 2011/09/18 19:48 | PERMALINK | EDIT/DEL

      헉. 내일 포스트가 평가에 대한 얘긴데요. 어떻게 아셨습니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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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재와 불안 :: 2011/09/02 00:02

2010 제1회 젊은작가상 수상작품집
김중혁 외 지음/문학동네

배명훈의 단편소설 '안녕, 인공존재!'에는 아래와 같은 기이한 제품 설명서가 등장한다.

본 제품은 데카르트의 방법론적 회의 공법으로 디자인되었습니다. 데카르트는 Cogito ergo sum이라는 특정 형태의 존재를 최초로 추출해낸 프랑스 학자입니다. 물론 존재를 추출하는 데 성공한 사람이 데카르트가 처음은 아닙니다. 하지만 데카르트가 중요한 이유는 존재를 추출해내는 데 사용한 방법을 근대적인 형태의 기록으로 남겼을 뿐만 아니라, 추출해낸 존재를 응용하는 방식까지 구현해냈기 때문입니다. 방법론적 회의 공법은 감각기관의 정확성을 하나씩 의심하는 데서부터 시작합니다. 빛, 소리, 촉감 등 세상으로부터 개체를 향해 유입되는 신호를 받아들이는 모든 감각기관은 그 자체가 오류를 범하도록 디자인되어 있습니다. 개별적으로 존재하는 감각정보 하나하나로부터, 결코 실재하지 않는 세상이라는 통합적인 공간을 재구성하여 인간의 머리 속에 재현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진짜 존재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인간의 감각기관을 확장시키기 위해 고안된 모든 디바이스를 차단해야 합니다. (전원을 연결했을 때 작동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현상은 기기 고장이 아닙니다) 본 제품은 Dubito 회로라는 회의 회로를 통해 데카르트의 존재 추출법을 반복 시행하여 순도 높은 결정 형태의 존재, Cogito를 추출해냅니다. 회의회로 동작 결과, 모든 외부 자극과 그로 인해 제품 내부에 가상으로 만들어지는 이미지는 완전히 부정되며, 이 같은 무한 의심이 반복되면서 오로지 의심만 하는 가상자아 하나만이 남게 됩니다. 곧이어 의심하는 자아가 의심하는 자아 스스로를 의심하는 논리 순환에 이르는 순간 Cogito가 발생합니다. (전원 연결 후 오 분에서 육 분 사이에 이루어지며 이후 지속됩니다)


소설을 읽고 난 후, 떠오르는 생각 토막.

존재는 자신에 대한 계산을 한다.

존재는 자신에 대한 계산을 하지 않을 수도 있다.

자신에 대한 계산을 할 경우, 존재는 계산식 안에서 살아가게 된다.

자신에 대한 계산을 하지 않을 경우, 존재는 그대로 존재하게 된다.

계산을 통해 자신을 의심 & 확신하게 된다는 것.

계산하지 않음으로 인해 자신을 뿌연 안개 덩어리로 계속 놔둔다는 것.

계산한다는 것은 계산하는 주체를 안심시킨다.

계산하지 않는다는 것은 계산하지 않는 주체를 안심시킨다.

불안하니까 계산하는 것이다.

불안하니까 계산하지 않는 것이다.

결국 존재의 근원은 불안일 것이다.



PS.  관련 포스트
존재 확인의 압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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