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에 해당되는 글 8건

MBA :: 2017/02/27 00:07

10일 만에 끝내는 MBA 
스티븐 실비거 지음, 김성미.이은주 옮김/비즈니스북스

모든 분야는 특유의 언어를 지닌다.

경영에도 언어가 있다.
경영의 틀을 규정하고
경영의 결을 형성한다.

그런데..
특정 분야의 언어를 잘 알면 그 분야를 잘 아는 것일까
특정 분야의 언어에 능통하면 그 분야에 능통하게 되는 것일까

언어는 그저 언어일 뿐
언어를 몰라도 분야를 통찰할 수 있다면

언어는 언어이다.
분야는 분야이다.

언어와 분야 간의 관계는 존재할 수 있어도
언어 능력이 분야에 대한 접근성 자체를 어찌하지는 못할 것이다.

MBA 다녀오지 않아도 얼마든지 경영을 잘 해내는 사례가 넘치고 넘친다.
언어에 특별히 밝지 않아도 몸과 마음으로 분야를 직시하고 부딪치면서 얻어나가는 리얼리티의 힘은 강할 것이다.

그래도 언어를 접하고 언어에 재미를 느끼는 것도 의미는 있겠다.
언어를 단지 기능적 도구로 여기지 않고, 언어 자체에서 매력을 발견할 수 있다면 말이다.

그리고 언어 없이도 얻을 수 있는 통찰과는 사뭇 다른
틀과 결을 가로지르는 언어 자체로부터의 통찰을 생성할 수 있다면
그건 또 다른 얘기일 것이다.

언어는 단지 기능적 도구 이상의 그 무엇이다.
언어를 기능으로 대할 것인지
언어 자체를 하나의 분야로, 하나의 장르로 대할 것인지
선택에 따라서 언어는 그에 맞춰진, 그에 따라 달라지는 모습으로 다가온다.

그래서 특정 분야의 언어를 다룬 책을 보면
그 분야 보다는 언어 자체에 시각이 맞춰지는 느낌이다.
분야에서 언어를 발라내었을 때 남는 그 무엇
그로부터 풍겨지는 냄새가 좋아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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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해와 재밍 :: 2014/02/05 00:05

오해(誤解): 그릇되게 해석하거나 뜻을 잘못 앎. 또는 그런 해석이나 이해.



우리는 오해 속을 살아간다. 자신 만의 렌즈를 끼고 세상을 바라보기 때문에 정확히 사실을 직시하기가 힘든 것이고 모든 사람이 렌즈의 굴절 현상으로 인해 사물을, 사람을, 관계를 있는 그대로 수용하지 못하고 자신 만의 묘한 결로 해석을 하게 되는데 그 해석이 실재와 괴리가 제법 나는 경우가 빈번하게 발생하곤 한다.  그래서 우리는 수시로 오해하고 수시로 오해 받는다. 오해는 인간의 일상 속에 깊숙이 침투하고 있는 삶의 양식 그 자체이다.

그런데..
'오해'를 '오해'하고 싶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오해란 단어에서 부정적인 기운을 걷어낸다면 오해는 나에게 어떤 느낌으로 다가올 수 있을까? 오해가 없다면 우리 삶은 얼마나 단조로울까? 무엇이든지 있는 그대로 직시하고 그것에 대한 한 치의 착각도 허용되지 않는 명징함이 공기를 가득 메우면 그건 어떤 모습일까? 오히려 오해가 있기 때문에 삶의 색깔이 다채로워지는 것은 아닐까?

오해를 의도된 행위라고 본다면, 오해는 재밍과 접목될 수 있겠다. 재밍은 즉흥적인 변주 행위를 의미하는데 가끔 재즈를 듣다 보면 재밍의 진수를 어렴풋이 느끼게 되고 그런 기운을 내가 하는 행위에 연결시키고 싶은 욕망을 느끼게 된다. 바로 그 지점에서 '오해'란 단어를 새롭게 조명해 본다면 어떨까. 오해를 인지 체계의 오류로 인한 에러로 간주하지 말고 오해를 매우 적극적인 재밍 행위로 규정한다면?

오해는 '인지적 재밍'이다. 오해는 사물이란 악보를 보면서 악보 그대로 사물을 이해하지 않고 나만의 방식으로 사물을 재밍(오해)하는 것이다. 오해는 사람이란 악보를 보면서 악보에서 규정하는 준수사항을 지키지 않고 그것의 외연에 존재하는 악보의 새로운 가능성을 탐색하는 행위이다. 오해는 관계란 악보를 보면서 악보의 권위에 내재한 암묵적 강압을 살짝 비웃어주면서 악보 속에 숨어 있는 신선한 일탈의 기회를 적극 발굴하는 행위이다. 오해가 갖고 있는 긍정적 DNA를 증폭시키면서 오해를 즐길 수 있다면 오해는 재즈 뮤지션들의 멋진 재밍보다 더 깊이 있는 혁신적 연주로 이어질 것이다.  

세상은 오해의 기운으로 가득 차 있다. 그건 재밍의 기운이다. 멍청하고 둔해서 오해를 저지르는 것이 아니라, 깨어있고 명민하니까 오해를 수행할 수 있는 것이다. 세상을 향해 오해를 혁신적으로 수행할 수 있는 자. 오해의 재밍을 연주하면서 세상을 자신 만의 선율로 수놓을 수 있는 자. 나는 그런 사람이 되고 싶다. 나만의 오해를 계속 축적하고 그렇게 쌓인 오해들이 나만의 재밍 연주 리스트에 차곡차곡 쌓여가는 모습을 행복감 가득한 미소로 바라봐줄 것이다. ^^




PS. 관련 포스트
재밍, 알고리즘
나는 뮤지션이다.
Jam Reading
복사기 vs. 재즈뮤지션
시선과 거리
생각의 파동, 언어의 파동
이름 함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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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3/07/26 00:06

생각은 결을 타고 흐른다. 하다 못해 종이에 글을 적을 때 볼펜과 종이가 만나는 촉감,질감의 차이에 따라 생각의 흐름은 궤를 달리하기 쉽다. 어떤 종이를 사용하는가, 어떤 펜을 사용하는가가 모두 변수가 되고 종이에 글을 적는 시간, 공간, 장소의 영향도 만만치가 않다. 또한 종이에 글을 적는 모드가 아니라 보드 옆에 서서 마커로 뭔가를 적는 행위도 생각의 플로우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 생각은 그야말로 마이크로한 민감성이 작동하는 영역일 수 밖에 없고 생각에 영향을 주는 변수를 어떻게 조합/변이시키는가에 따라 생각의 궤적은 지구 주위를 뱅뱅 돌 수도 있고 태양을 향한 질주를 할 수도 있고 저 멀리 안드로메다로 날아갈 수도 있는 것이다.

생각은 점 상태에 머물고 있다가 어느 순간 선이 되어 흐름을 생성하고 어떤 계기를 맞아 면이 되어 질감을 형성하고 어떤 자극을 받아 입체가 되어 존재감을 구성한다. 생각 점이 생각 선과 만나 결을 만들어내고 생각 입체가 생각 점과 만나 결을 생산하는 과정들이 서로 중첩되고 융합되면서 결은 세상을 가득 메운 공기와도 같이 뇌 우주 속을 자욱한 결의 안개로 채우게 된다. 결은 내가 처한 시공간의 미세한 레버 조절에 의해 천양지차의 흐름 차이를 만들어내고 특정 시공간에서 결은 증폭을 거듭하며 역동성을 발현한다.

제한된 생각 밖에 하지 못한다는 생각은 절대 하지 말자.  사고의 한계를 느끼는 이유는 생각의 결을 다양화시킬 수 있는 장치에 대한 학습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누구나 우주적 사고를 할 수 있다. 단지 우주적 생각의 결을 촉발시킬 수 있는 환경 조성 능력에서 천양지차를 보이기 때문에 대부분의 사람들은 생각 확장의 잠재력을 보유하고도 그것을 실제 상황으로 연결시키지 못할 뿐이다.

생각의 결에 민감할 수 있어야 한다. 내가 어떤 시공간에서 생각 결을 증폭시킬 수 있는지. 그건 의도적으로 결에 집중할 수 있는 각자의 몫일 수 밖에 없다. 다양한 상황에서 여러가지 생각 입출력 장치를 튜닝하면서 결 증폭을 위한 최적 환경에 대한 테스트를 이리저리 수행하다 보면 자신에게 적합한 결 증폭 맥락에 대한 감이 생기는 것이고 그 감을 지속적으로 발전시키면 어느 순간 나는 생각에 관한 한 1명의 개인이 아닌 거대한 사고 확장 발전소를 운영하는 '결' 관리자가 되는 것이다.

나를 감싸고 있는 결을 느껴보자. 지금 당장은 제한적인 수준으로밖에 작동하지 않는 결이지만 거기에 어떤 자극을 주면 결이 꿈틀대는지 다양한 테스트를 나에게 가해보자. 그렇게 하는 과정 속에서 나의 결은 서서히 나에게 마음을 열게 될 것이고 그런 정기적인 결과의 커뮤니케이션을 통해 나와 결은 서로를 돈독하게 이해하며 서로를 건전하게 자극하는 상호 협력자 내지는 동반자가 될 것이다.

생각은 결을 타고 흐른다. 어떻게 결할 것인가? ^^


PS. 관련 포스트
점, 선, 면, 입체, 그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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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을 정의하다. :: 2013/07/15 00:05

나는 아침형 인간이 아니라 늦잠형 인간이다. 그래서 새벽 시간대에 깨어 있는 경우가 거의 없다. 그런데, 몇 년에 한 번 정도, 아주 피치 못할 사정에 의해 새벽 시간대에 마지 못해 일어나는 경우가 있다. 그런데, 새벽 시간대의 공기가 사뭇 다르다는 것을 느끼게 된다. 뭐랄까. 어떤 에너지 같은 것이 고요히 흐른다고나 할까.

새벽을 그닥 많이 경험하지 못해서 새벽에 대해 말한다는 게 오버일 수는 있으나, 짐작건대 하루 중에 가장 강력한 기가 흐르는 시간대는 아마 새벽일 것이다. 새벽에 일찍 일어날 수 있는 사람은 특별한 기운이 흐르는 새벽 시간대를 자신을 위한 영역으로 활용할 수 있을 것이며, 새벽을 자신의 시공간으로 끌어들일 수 있는가의 여부는 자기 계발에 있어 매우 중요한 요인일 것이다.

나는 새벽 시간에 무엇을 하고 있는가?
나는 새벽 시간에 그저 잠을 자고 있을 뿐이다.
그럼 나는 중요한 시공간을 무심코 흘려 보내는 둔한 존재로 머물러 있어야만 하는 것일까?

꼭 그런 건 아니라고 생각한다.

새벽 시간을 어떻게 보내는가가 '나'라는 존재가 범용품이 아닌 존재의 이유를 발산하는 인간이 될 수 있는가를 좌우할 수 있으니 그 시간에 깨어 있어서 의식의 흐름을 전개하는 게 바람직한 건 맞다.
하지만 '새벽'은 꼭 물리적 시간대만을 의미하진 않는다. 나의 생각과 행동이, 나의 과거와 미래가 온전히 '나'라는 존재를 향해 모여드는 순간들이 흐름으로 생성되는 시공간을 나만의 방법으로 확보할 수 있다면 그것이 어느 시간대, 어느 공간대이든 상관은 없다고 본다.

모든 존재는 자신 만의 결을 갖고 있고, 자신 만의 결을 따라 흐른다. 나는 아침형 인간과 사뭇 먼 DNA를 지닌 채 태어났다. 그래서 새벽에 일어나는 게 매우 고통스럽다. 타고난 체질이 아침형이 아닌 사람은 새벽을 만날 기회를 절대 얻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 만의 새벽을 새롭게 정의해야 할 숙제를 부여받게 되었다고 보면 된다. 나만의 결을 따라 흐르는 시공간이 나에게 새벽과도 같은 공기와 환경을 제공해 준다면 그 시공간은 나에게 분명 새벽이라 일컬어져도 무방할 것이다.

나는 블로깅을 할 때 '새벽'을 만나는 경험을 하게 된다. 나의 블로그와 나 사이엔 묘한 기운이 흐른다. 새벽을 자주 만나는 새벽인들이 접하게 되는 느낌과 내가 체험하고 있는 기운은 그닥 차이가 나지 않을 것이라 추정해 본다. 블로깅을 하고 있는 나. 그런 내 주위를 따라 흐르는 공기, 그리고 그 공기와 함께 호흡하는 나. 주위에 형성되는 어떤 장. 그건 분명 '새벽'이라고 밖엔 말할 수 없는..
결국 모든 존재는 자신 만의 '새벽'을 갖고 있다. 다만 그것과 어떻게 만나야 하는 지를 아는 자와 모르는 자로 나뉠 뿐이다. 나는 블로깅을 통해 나만의 새벽을 생성하고 그것을 기뻐할 수 있는 기회를 부여 받았다. 새벽이여, 그대와 함께 할 수 있어서 참 기쁘다. ^^



PS. 관련 포스트
시간 속의 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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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BlogIcon 아크몬드 | 2013/07/15 10:52 | PERMALINK | EDIT/DEL | REPLY

    아크세븐 블로그 포스팅할 때는 매일같이 새벽을 맞았던 것 같습니다. 물론 아침엔 좀 늦게 일어나게 되지만, 고요하고 집중이 잘되는 새벽은 블로거에게 최적인 시간이 아닐까 합니다.(인터넷 속도도 좀 더 빠르구요 ^^)

    • BlogIcon buckshot | 2013/07/15 19:20 | PERMALINK | EDIT/DEL

      아.. 저도 물리적인 새벽 시간대를 향유하고 싶은데 체질이 말을 안 듣네요. ^^ 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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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읽기, 소설 쓰기 :: 2013/06/28 00:08

읽는다는 것은 결코 수동적인 행위가 아니다. '읽기'는 정보를 일방적으로 수용하는 행위가 아니라는 사실을 몸소 실천에 옮겨볼 필요가 있다. 책을 읽을 때 생각의 결이 저자가 제시하는 특정 경로 만을 따라서 수용적으로 흘러가는 경향이 자연스럽긴 하지만 그런 수동적 읽기 패턴을 의심하고 독자적인 사고를 수행하는 독자 모드로의 전환을 조금씩 익혀나갈 수 있다면 읽기는 또 하나의 쓰기로 변신할 수 있다.

소설을 읽을 때, 다음엔 어떤 이야기가 나올까란 궁금증을 갖고 읽게 된다. 앞으로 펼쳐질 서사의 흐름은 작가가 갖고 있는 특유의 생각 결에 전적으로 의지될 수 밖에 없다. 생각의 결은 사람마다 고유한 것이어서 타인에게 그것이 신선하게 다가오기도 하지만 한 편으론 타인에게 은근한 거부감을 선사하기도 한다. 결은 그저 결일 뿐이다. 그건 정답도 아니고 오답도 아닌 것이다. 하지만 소설을 읽을 때 설정되는 저자와 독자와의 관계는 은근 선생과 학생 간의 관계와 유사한 것이어서 독자는 저자가 전개하는 서사의 흐름을 무방비 상태로 주입 받곤 한다. 물론 저자의 결이 소설을 끌고 나가는 것이지만 그 소설을 읽는 독자의 지분이 과연 미미한 수준에 그쳐야 하는 것일까? 저자와 독자와의 관계는 어떤 모습으로 설정되어야 하고 거기서 독자의 비중은 과연 몇 %여야 하는 걸까?

저자의 결은 저자의 결일 뿐이다.
독자는 소설을 읽으면서 저자가 제시하는 서사의 흐름을 결코 인정할 필요가 없다. 만약 어느 시점에서 저자가 이끄는 스토리라인에 더 이상 매력을 느끼지 않게 되었거나 다른 생각의 결이 자꾸 뇌리를 간지럽힌다면 바로 그 지점에서 새로운 스토리라인을 창발시킬 분사 모드로의 전환을 모색할 수 있겠다. 저자의 서사는 그저 참조만 하는 것이고 독자의 서사가 독자적인 결을 형성하면서 저자의 서사를 대체해 나가는 저작의 흐름을 타기 시작하는 것이다.

소설에 적혀 있는 내용을 단지 한 가지 경로일 뿐이라 여길 수 있다면 소설을 읽다가 어느 시점에서 소설과 결별하고 소설과 독립된 경로를 구축해 나가는 나만의 소설을 써 내려갈 수 있겠다. 또는 소설을 다 읽고 나서 그 소설에 착안한 또 하나의 소설을 쓸 수도 있겠다. 중요한 건 하나의 소설을 하나의 트랙으로 간주하고 그 소설을 가능케 한 심층기반에서 파생되는 여러 가지 소설이 가능하다는 것을 인정하고 그 소설을 읽고 있는 독자인 나로부터 완전히 새로운 또 하나의 소설이 생성될 수 있음을 기대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우리 모두는 소설가이다. 우리 안엔 나만의 스토리가 무수히 많은 생각의 결 속으로 숨겨져 있다. 그것들은 수시로 우리의 의식과 무의식의 경계를 횡단하며 우리에게 자신을 알아봐 달라고 신호를 보내나 우리가 그걸 인지 못하거나 설사 인지했더라도 그걸 망각할 뿐이다. 결국 네비게이션의 문제이다. 자동차만 네비게이션이 중요한 게 아니라 우리의 생각, 우리의 예술가적 재능엔 네비게이션적인 접근이 필요하다. 나만의 생각 결을 나만의 텍스트로 형상화하는 네비게이션 플랫폼을 어떻게 구축할 것인가? 나의 기억과 망각을 수면 위아래로 춤을 추게 하고 나의 끼와 감정을 컨트롤할 수 있는 나만의 경로 관리 기술을 어떻게 가져갈 것인가?

예전엔 독자가 저자가 될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요즘은 다르다. 독자는 반드시 저자가 되어야 한다.
독서의 끝은 수천 권,수만 권을 읽었다는 포만감이 아니다.
독서의 끝은 '독자의 저자 되기'이다. ^^



PS. 관련 포스트
독저, 알고리즘
위키 독서
독서와 구원등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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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BlogIcon 아크몬드 | 2013/06/28 00:41 | PERMALINK | EDIT/DEL | REPLY

    편집 일을 배우는 입장에서, 많이 공감합니다.
    좋은 콘텐츠를 가진 분이면 얼마든지 저자가 될 수 있는.. ^^

    • BlogIcon buckshot | 2013/06/28 09:18 | PERMALINK | EDIT/DEL

      결국 모두에게 좋은 컨텐츠가 있는 것이고, 그걸 발견할 수 있느냐의 문제인 것 같아요. ^^

  • BlogIcon 고구마77 | 2013/06/28 14:31 | PERMALINK | EDIT/DEL | REPLY

    오랜만에 뵈요. 잘지내시죠?

    저는 요즘 영어공부하는 페북 페이지 돌보느라 개인 블로그를 할 시간을 못찾고 있습니다.

    말씀하신 맥락과는 좀 다르지만, 여튼 독자의 저자되기 일환으로 최근 카카오페이지 론칭 준비를 했다가 많은 시행착오만 했네요 ^~^

    디지털 활자미디어의 상품화에 대해 많은 고민과 깨달음을 얻는 시기를 보내고 있슴다.

    • BlogIcon buckshot | 2013/06/28 14:55 | PERMALINK | EDIT/DEL

      오랜만입니다~ 바쁘게 지내고 계신 것 같네요~

      그동안 얻으신 통찰을 블로그에 올려주심 참 좋을 것 같아요. ^^
      http://blog.naver.com/pupilpil

      고구마님께서 포스팅해주시면 많은 분들께 귀한 가르침이 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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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과 바보 :: 2013/05/17 00:07

10년 전이다..
점심 먹으러 식당에 갔다. 비빔밥을 시켰다. 비빔밥이 나왔다. 앞에 고추장인가 싶은 게 있어서 그걸로 비볐다. 그런데 이상하게 잘 비벼지지 않았다. 넘 뻑뻑했다. 그래도 열심히 비볐다. 혼신의 힘을 다해서 비볐다. 그래서 한 그릇을 뚝딱 다 먹었다. 다 먹고 나서야 알았다. 그게 고추장이 아니라 설렁탕에 넣는 다대기였다는 것을..

최근이다.. (3월2일 토요일 저녁)
집사람이 냉장고에 포도주가 있다고 했다. 딸내미에게 포도주를 갖고 오라고 했다. 딸내미가 포도주를 갖고 왔다. 큰 통을 열었더니 포도주가 떡이 져 있어서 그걸 스푼으로 억지로 퍼내서 컵에 담은 다음, 그것에 물을 퍼서 휘저었는데 잘 휘저어지지가 않았다. 억지로 휘저어서 벌컥벌컥 넘겨 마셨다. 마시고 난 후에야 알았다. 그게 포도주가 아니라 딸기잼이었다는 것을..

10년 전과 최근 사이에도 이런 일화들은 무수히 많다. 쩝..

뭔가를 굳건히 믿고 (다대기를 고추장이라, 딸기잼을 포도주라) 한 치의 흔들림도 없이 의식을 수행하는 머저리 같은 나의 모습에서 나는 믿음의 힘을 느낀다. 뭔가를 강하게 믿을 때 뭔가로부터 파생되는 또 다른 뭔가에 대한 감각체계가 완전히 무너질 수도 있는 것이고 그런 감각체계의 전복을 통해서 나의 인지와 경험은 전혀 새로운 국면을 맞이할 수 있다는 걸 새삼 느끼게 된다. 일상 생활에서 이런 일이 자주 일어나면 곤란하겠지만 사유의 세계에선 이런 일을 얼마든지 겪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A를 A로만 여기고 생각을 하다 보니 생각의 홈이 특정 경로로만 너무 깊게 파여서 자칫 단조로운 사유 패턴에서 한 치의 일탈을 즐기는 것도 그리 쉽지 않으니 말이다. 가끔은, A를 완전히 다른 B로 믿고 B에 대한 생각의 결을 펼쳐나갈 수 있는 바보 머저리가 되고 싶다. ^^


PS.
사실, 3월2일 토요일 저녁의 해프닝은 나름의 이유가 있었다.
3월1일에 무심코 딸내미(10살)가 피아노학원에 가서 피아노 치는 것을 보게 되었다. 근데 딸내미가 치는 피아노 솜씨가 의외로 괜찮았다. 별 기대 없이 갔다가 살짝 놀라버렸다. 아니 제법 많이 놀랐던 것 같다. 딸내미는 내일 피아노 콩쿠르에 나가는데 집에서 연습하면 시끄럽다고 항의가 들어오니 학원에서 파이널 연습을 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3월2일 토요일, 딸내미는 피아노 콩쿠르에 참가하러 갔고 나는 "설마 상이야 받겠어?"라는 생각을 하며 집에서 TV나 보고 빈둥거리고 있었다. 그런데 몇 시간 후에 딸내미한테서 전화가 왔다. 3학년 부문 대상을 받았다는 거다. 전체 참가인원이 거의 100명이었다고 한다. 완전 깜놀이었다. 갑자기 딸내미가 전혀 다른 사람처럼 느껴졌고 대견스러움을 넘어 존경스럽기까지 했다. 부랴부랴 밖으로 나가서 딸내미에게 맛있는 저녁을 사주었고 급기야 스마트폰까지 사주게 된다. ㅠ.ㅠ  그리고 집에 와서 멍하니 널브러져 있다가 딸내미한테 포도주를 가져오라고 했고 딸내미는 포도주를 가져왔고 난 그것이 당연히 포도주라고 믿고 열심히 먹게 되었던 것이다. 그 날 저녁엔 딸내미가 무슨 말을 해도 난 다 믿었을 것 같다. 3월2일은 '믿음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확실하게 학습을 했던 날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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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toms sale

    Tracked from toms sale | 2013/06/13 10:48 | DEL

    I constantly spent my half an hour to read this website articles Read & Lead - 믿음과 바보 all the time along with a cup of coffee.

  • toms shoes

    Tracked from toms shoes | 2013/06/13 10:49 | DEL

    I know this web page gives quality depending articles or reviews %title% and additional material, is there any other web page which gives these stuff in quality?

  • BlogIcon The Black Ager | 2013/05/17 00:56 | PERMALINK | EDIT/DEL | REPLY

    헐... 메시지엔 공감하더라도 사례가 좀 심한 거 아닌가요? ㅋㅋㅋ 사물은 오감으로 느껴지니 저런 일이 아무한테나 자주 일어나는 건 아니지만 형태가 없는 개념의 경우에는 진짜 집단적으로 바보가 되는 일들도 많은 것 같아요. 그런 바보됨을 즐기고 천착해서 새로운 세계를 열든지, 나름의 분별력을 키우려고 노력하든지 본인 선택이겠죠. ^ ^

    • BlogIcon buckshot | 2013/05/17 15:15 | PERMALINK | EDIT/DEL

      예.. 아무리봐도 사례가 좀 심해요.. 너무 어이가 없기도 하고 웃음이 나오기도 하고. 그래서 함 적어보았어요. 새로운 세계의 열림과 분별력의 견지는 백지 한 장의 차이인 것 같아요. 참 재미가 있어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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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타의 미학 :: 2013/04/22 00:02

남을 생각하지 않고 혼자 만의 글을 쓸 때에는 문법이나 오타에 크게 구애받지 않고 글을 막 적곤 한다. 그런데, 문법을 무시하고 오타가 나도 신경을 쓰지 않고 글을 마구 적다 보면 나름 그것 자체가 생각의 자유로운 흐름을 원활하게 해준다는 느낌을 받게 된다.  문법에 신경 쓰느라 글의 내용보다는 글의 형식을 더 챙기게 되고 오타를 신경 쓰다가 글의 의미에 집중하지 못하고 글의 규격에 주의력이 분산되는 상황에서 벗어나게 된다고나 할까. 마구 글을 써나가는 것의 장점이 의외로 쏠쏠하다는 것을 최근에서야 비로소 알게 되었다.

문법에 어긋나는 글을 적다 보면 글의 내용조차 자유로워지는 효과를 볼 수 있다. 문법은 일종의 규칙이고 제약인데 문법이 규정하는 프레임 안에서 글을 적다 보면 생각마저 프레임 안에서 맴돌게 되는 문법적 교착 상태에 빠지기가 쉬운데 문법을 의식하지 않는 글을 적게 되면 생각 자체가 어떤 틀에 얽매이지 않는 자유도를 갖게 되어 자유로운 환경이 생각을 자극하고 자유롭게 유영하는 생각이 환경을 더욱 유연하게 해주는 시너지 상황이 연출될 수 있는 것이다. 

혼자만의 글을 쓸 때에는 문법에 맞지 않는 문장을 적게 되더라도 그냥 넘기자.  설사 오타를 적게 되더라도 오히려 그것을 즐기자. 문법에 맞지 않는 문장을 적다가 불현듯 새로운 생각이 떠오를 수 있는 것이고 오타를 양산하다 보면 오타에서 파생되는 의미의 변주곡이 나에게 전혀 예상치도 않았던 영감을 뜬금없이 제공할 수 있다.

아니, 의도적으로 문법을 무시한 글을 써보자. 의도적으로 오타를 대량생산해보자. 그런 과정은 이미 생각의 자유도를 확보하고 있다는 스스로에 대한 선언이 되는 셈이고 그런 자유로운 플레이를 지속하다 보면 생각은 예전의 그것과는 사뭇 다른 행보를 보일 수도 있겠다.

페이스북이란 서비스를 사용하면서 광장 속에 독방을 마련하고 난 후에 오타나 문법에 맞지 않는 글을 즐기는 버릇이 생겼다. 나 혼자 보려고 쓰는 글이라서 전혀 규칙에 맞게 쓸 필요가 없고 규칙에 맞지 않는 글을 나중에 읽어볼 때 그 글 자체가 갖고 있는 프레임적 한계나 그 글에 스며들어 있는 나의 선입견이 어느 정도 와해된 상태에 놓여져 있음을 확인하는 즐거움이 매우 크다.  말하자면, 정해진 홈을 통해서만 흘러가는 생각의 물줄기에 흥미로운 교란을 일으키는 놀이인데 새로운 생각의 홈을 파는 재미와 홈이 아닌 길을 흘러가는 짜릿함. 군독무의 진가라고나 할까.  아마 최근에 페이스북을 군독무 플랫폼으로 활용하면서 발생시킨 문법 타파, 오타 남발이 지금까지 내가 수십 년 간 생성했던 것보다 훨씬 더 많지 않을까 싶다. 엄청난 양의 문법이 내 손끝에서 해체되고 생각지도 못했던 오타가 타이핑되는 경험. 

"시선을 의식하지 않고 쓰는 글의 맛이 이런 것이구나!"

난 오타 공장의 공장장이다. 오타 공장을 운영하면서 오타의 의미를 배우고 오타에서 오타를 번식시키며 오타에서 파생되는 생각의 파격을 즐긴다. 누구나 오타를 대량생산할 권리가 있는 것이고 생성된 오타는 나의 생각 흐름의 강력한 윤활유로 작동하는 소중한 부메랑이 되어 돌아올 것이다. ^^



PS. 관련 포스트
언어 혁신
언어와 생각
언어의 이해
타인의 언어를 구사하기
담기와 담기기
생각의 파동, 언어의 파동
물리학은 바벨탑을 쌓고 있는가?
페이스북, 군독 플랫폼이 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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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buy toms

    Tracked from buy toms | 2013/06/13 10:49 | DEL

    It remarkable to visit this site and reading the views of all friends about this postRead & Lead - 오타의 미학, while I am also zealous of getting familiarity.

  • toms shoes

    Tracked from toms shoes | 2013/06/13 10:49 | DEL

    These all YouTube gaming video tutorials %title% are genuinely in pleasant quality, I watched out all these along by means of my friends.

  • BlogIcon 낙서 | 2016/12/01 02:40 | PERMALINK | EDIT/DEL | REPLY

    저는 글을 쓸때마다 심각한...오타를 양산하는 편이여서...오타를 적게 하는 방법은 없을까 검색하다가..이 블로그의 글을 보게 되었습니다..ㅎㅎ 긍정적인 오타의 관점..좋네요 예전에 머리속을 유연하게 하려고 글을 쓸때가 생각나기도 하구요

    • BlogIcon buckshot | 2016/12/01 21:55 | PERMALINK | EDIT/DEL

      아.. 3년 전의 글을 다시 환기시켜 주셔서 넘 감사합니다.
      요즘 오타가 유독 많아졌는데도 그닥 신경이 쓰이지 않는 이유가 바로 3년 전에 제 스스로에게 했던 다짐 때문인가 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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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단절 시대 :: 2012/08/22 00:02

초연결 시대.

모든 것은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을 실감케 해주는 각종 스마트한 도구가 초연결 시대를 리드하고 있다.

그런데..
실은 초연결 시대가 도래한 것은 아니다. 인간이 감지할 수 있는 연결이 인간 도구에 의해 가시화되고 있을 뿐, 연결의 강도가 예전보다 강해졌다고 보는 것은 무리가 있다. 연결도는 예전이나 지금이나 달라진 것이 없다. 뭔가가 연결되는 만큼 뭔가는 단절되기 마련이다. 더군다나 그것이 인간의 인위적인 조작에 의해 발현된 것이라면 더더욱 제로섬 게임의 굴레에서 벗어나긴 힘들다. 인간의 대표적 특기 중의 하나가 개선을 빙자한 개악, 발전을 가장한 퇴보 아니던가? ^^

표면적으로는 초연결 시대가 도래한 것 같으나 실은 초연결 시대와 함께 초단절 시대 또한 도래했다. 인간의 관점에서 말이다. 연결이 촘촘해지는 만큼 단절은 심화된다. 인위적 관점에서 연결도가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한다는 건 연결 급증의 에이전트가 존재한다는 것이고 에이전트가 연결을 주도하는 상황에선 인간은 뒷전으로 물러나 연결을 간접 경험하고 있을 뿐, 실질적인 연결 경험은 에이전트가 도맡아서 하고 있다. 페이스북 플랫폼 상에서 가공적을 창조된 나의 프로파일이 또 다른 가공의 프로파일과 대화하고 있는 것이지 나와 타인이 직접 대화하고 있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페이스북 유저는 페이스북이 정의한 게임 룰 속에서 플레이하는 일종의 로봇이다. 웹은 로봇과 로봇이 커뮤니케이션하는 공간이지 인간과 인간이 대면하고 오감을 교감하는 공간은 아니다.

연결의 접점이 늘어나고 연결의 빈도가 증가하는 건, 인간이 로봇이 되어 로봇 조종 플랫폼 상에서 무기력하게 플레이하는 기계적 노드가 되었음을 의미한다. 로봇 모드에선 인간 모드에서보다 확장성 있는 커뮤니케이션이 가능하나, 확장성을 얻은 대가로 직접성을 잃어버린다. 직접성은 연결 에이전트가 전담하고 인간은 에이전트 뒤에 숨어 에이전트가 제공하는 연결선에 의존하여 간접성의 향이 그윽한 기호,신호를 연결선에 띄워 어디론가, 어느 에이전트에겐가 보낸다.

도구에게 직접성을 전가할 수록 인간은 간접성의 향에 취해 흐릿해진다. 흐릿해지면 질수록 인간은 자신의 흐릿함을 인지하기가 힘들다. 초연결의 마력에 경도된 나머지 초단절이 동시에 동일한 세기로 진행되고 있음을 느끼지 못한다.

초연결의 시대에서 인간의 정체성은 명료하게 의도한 단절의 합으로 정의될 수 있다. 초연결이란 바다 속에 사는 인간이란 해면동물은 자신의 몸에 부착된 연결선에 의존한 채 연결을 호흡하며 살아간다. 연결을 호흡하다가 때때로 호흡을 중단하고 맞이하는 단절의 순간, 흐릿한 자신이 어떤 결을 갖고 있는지 어떤 겹으로 구성되어 있는지 희미하게 나마 감지하게 된다. 내가 누군지 알려면 내가 어떤 대세를 거부할 수 있는지를 확인하면 된다. 나는 어떤 연결을 거부할 수 있는가? 나는 어떤 연결을 의식적으로 끊고 단절을 즐겨라 호흡할 수 있는가?

모두가 초연결의 세상을 흐릿한 모습으로 살아간다.  흐릿해져 가기 싫다면 초연결 세상과 초단절 세상을 냉탕-온탕 드나들 듯 오갈 수 있어야 한다. 초단절 세상에 머무는 시간을 확보하지 못한다면 초연결 세상 속에서 아무런 체취도 뿜지 못하는 비존재로 전락할 수 밖에 없다.

초단절 시대. ^^




PS. 관련 포스트
무엇이 희소한가?
접속감과 세(勢)
극세관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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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BlogIcon uminsem | 2012/08/22 07:13 | PERMALINK | EDIT/DEL | REPLY

    기술이 발전할수록 파생실제가 실제를 대체하는 현상이 강화되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지도가 영토를 대체하고 통장에 찍히는 수치가 실제 돈을 대체하듯 인간관계도 소셜미디어라는 파생실제로 대체되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니, 언뜻 이런 생각도 해보게 되네요. 현실에서 맺는 관계는 파생실제가 아닌가? 오프라인에서도 학교와 같은 조직을 통해 에이전트가 요구하는 인간상을 길러내고, 우리가 맺는 인간관계나 학교에서의 추억이란 것도 어쩌면 게임의 룰 안에서 일어나는 에피소드는 아닐까? 그렇게 생각하고 보면 초연결은 온라인뿐 아니라 오프라인의 파생실제를 포함하는 개념으로, 초단절은 실존적 사유와 경험의 순간으로 나누어볼 수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 BlogIcon buckshot | 2012/08/26 10:40 | PERMALINK | EDIT/DEL

      추상이 실재를 뒤덮어가는 상황은 앞으로도 계속 심화될 것 같습니다. 추상의 위험성을 잘 이해하고 추상의 파도에 휩쓸리지 않도록 추상과 잘 노는 법을 몸에 익혀나가야 할 것 같습니다. ^^

  • BlogIcon 아크몬드 | 2012/08/22 09:32 | PERMALINK | EDIT/DEL | REPLY

    오히려 '초연결 도구'가 있는 세상이라 더욱 단절된 느낌을 받게 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 BlogIcon buckshot | 2012/08/26 10:40 | PERMALINK | EDIT/DEL

      예, 연결이 단절을 더욱 명확하게 하는 것 같습니다. 단절과 연결은 공생 관계인가 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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