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기와 망각, 그리고 기억 :: 2012/02/03 00:03

학창시절엔 암기력에 대한 로망이 있었다. 원리를 몰라도 암기만 잘하면 어느 정도 성적을 올릴 수 있으니 수많은 학생들이 암기에 집착하는 것이 당연할 수 밖에 없었다. 학창시절에 멋모르고 했던 암기 행위의 영향력은 지금도 지속되고 있는 것 같다. 암기는 정보를 대하는 하나의 태도라서 그렇다. 정보의 의미를 깊게 파헤치지 않고 기계적으로 명기했다가 재생하는 암기 행위.

암기는 매우 치명적인 창의력 파괴활동이라 볼 수 있을 것 같다. 자연스런 정보의 유출입과 정보 간 연결이 창의력 작동의 토대인데 억지로 정보를 어딘가에 붙들어 맨다는 것은 정보 자체의 유연성과 정보의 유동성을 모두 구속하는 결과를 낳게 된다. 암기를 위한 노력이 가열차게 전개될수록 창의력을 유지하기 위한 반작용도 치열하게 일어나게 된다. 망각은 정보 유연성/유동성을 유지하기 위한 본능적 플로우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선 대부분의 시간이 화폐화된다. 화폐화된 시간은 망각보다는 암기를 선호한다. 돈의 흐름을 끊임없이 이어가기 위한 치밀한 계획과 실행만이 화폐화된 시간의 무의미한 낭비를 막을 수 있기 때문이다. 시간이 화폐화 되어가는 만큼 망각에 대한 거부감은 커질 수 밖에 없다.

하지만,
망각은 새로운 정보가 유입되었거나 기존 정보에 변화가 필요하다는 신호이다. 그걸 억지로 막기 위해 메모를 하거나 얼럿으로 리마인드하는 것은 기계적인 반응 메커니즘에 스스로를 붙들어 매는 행위이다. 화폐화된 시간이 지배하는 곳에서 살기 위해 메모/리마인드를 하는 것이 불가피하다는 것을 부정하긴 어렵지만 기계적 반응 메커니즘을 맹목적으로 수용하고 그것에 푹 젖어 사는 태도에 대해선 반성을 해볼 필요가 있다.

기억과 암기를 분리해야 한다. 
그리고, 기억과 망각을 연결시켜야 한다.

기억은 정보의 끊임없는 편집을 의미한다. 동일한 과거의 사건이라도 그것을 다시 호출하는 시점이 언제냐에 따라 기억의 내용은 끊임없이 달라진다. 동일한 정보가 박제된 상태로 계속 유지되는 것은 사고 흐름을 방해하는 암초와 같은 작용을 하게 된다. 그래서 기억은 저장이라기 보다는 동적 편집에 가까운 개념이다 . 그래서 기억은 암기와는 다른 DNA를 갖고 있는 것이고 오히려 망각과 밀접한 포지셔닝을 취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화폐화된 시간 속에서 불가피한 암기를 하면서도 나의 기억과 창의력이 맹목적인 암기로 인해 교란을 당한다는 사실은 반드시 인지해야 한다. 그것을 분명히 인지하면 할수록 암기와 망각 간의 절묘한 균형상태를 유지할 수 있고 그 균형 속에서 나의 기억, 정체성, 창의력은 선명한 존재감을 발현할 수 있을 것이다.

스마트 디바이스가 창궐하면서 암기 에이전트 기능이 발전해 나갈수록, 망각 관리 능력은 점점 더 희소성과 소중함을 더해갈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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